『파친코 』와『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 』 이민진 작가님 소설의 주인공들이 읽는 책으로도 소개되고 여러 인터뷰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어소설이라고 추앙하는『 미들마치 』를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약 3주에 걸쳐 읽었다. 민음사 버전으로 각 700여페이지 총 2권이다.
역시나 초반은 쉽지 않았다. 대체 왜 스물도 안 된 귀족 아가씨가 스물일곱살 연상의 하루 종일 퀴퀴한 방에서 연구만 하는 늙수그레 아저씨와 결혼을 하려고 하는가. 이 부분부터 난관이었다. 1권의 80페이지 정도까지가 인내의 구간이었고 그다음부터는 작가에 대해 놀라며 이 책이 쓰인 시대를 돌아보며 읽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미들마치'라는 영국에 있는 가상의 소도시다. 시대적 배경은 1931년 전, 영국의 1차 선거법 개정 직전이다. 선거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방대하게 펼쳐져 있고 각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혀 있어 책을 읽다가 영국의 1차 선거법 개정에 대해 살펴보기도 했다. 계속 휘그당, 토리당, 개혁 이런 키워드가 반복해서 나온다. 이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영국의 1차 선거법 개정으로 인한 변화 (AI 참고)
1. 부패 선거구 폐지 : 인구가 사라진 마을에도 여전히 의원을 배출하고 있었음. 이때 산업혁명으로 맨체스터, 버밍업 등 대표성이 커짐. 실제 사람이 사는 곳과 의회에서 대표되는 곳이 일치해야 된다고 생각.
2. 중산층 남자들에게 선거권 확대 : 연 10파운드 이상의 임대료의 주택, 상점 '남성' 소유자에게 선거권 부여.
귀족 중심의 정치에서 재산을 가진 남성 중산층까지 확대이며, 여성은 배제
미들마치에는 여러 커플이 나온다.
1. 도러시아 브룩과 에드워드 캐소본
사회적 제약으로 지적 열망을 채우지 못한 도러시아. 학자인 캐소본과 결혼하여 그의 연구를 돕는 조수가 되길 갈망했지만 남편 일생의 역작인 『모든 신화의 열쇠』가 시대에 뒤떨어진 연구라는 걸 깨닫고 실망한다. 자격지심에 전전긍긍하던 캐소 본은 이내 알아차리는데 이는 더욱더 캐소본의 열등감을 자극하게 되면서 결혼생활은 더욱 냉랭하게 된다. 그러던 중 캐소본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드러난 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젊은 아내가 자신의 사촌인 윌 래디슬로와 재혼할 경우, 자신의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긴 것이다. 정말 치졸함의 끝이다.
이후 유언장으로 인한 속박 때문에 도러시아와 윌 래디슬로의 관계는 진전되지 않는 것 같았으나 래디슬로가 로저먼드와 같이 있던 장면을 보고 도러시아가 오해하면서 폭풍우 치는 날 극적으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역시 영국 소설이다. 대부분의 극적 사건은 폭우가 도와주기도 하니까. 도러시아는 남편의 유산을 마다하고 연간 연금처럼 받는 본인의 재산만 가지고 재산도 없는 게다가 당시 시대상으로 혈통도 나쁜 래디슬로와 결혼한다. 이상주의자이자 똑똑하고 정말 '좋은 여자'였던 그녀가 래디슬로를 뒷바라지하면서 인생을 보낸 것이 안타깝지만 저자는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우리 변변찮은 인간들은 일상적인 말과 행동에서 수많은 도러시아의 생애를 준비하고 있고, 그중 어떤 이들은 우리가 아는 도러시아보다 훨씬 더 슬픈 희생을 보여줄지 모른다. 섬세하게 조각된 그녀의 정신은 널리 눈에 띄지 않아도 섬세한 결심을 거두었다." 2권 p669
2. 터시어스 리드게이트와 로저먼드 빈시
귀족 신분이지만 의학을 선택한 리드게이트. 당시 혁신적인 의술로 미래에 대한 당찬 포부를 펼치던 그는 미들마치의 도시에서 꿈을 이루리라 기대한다. 빈시네 가족 파티에서 아름다운 로저먼드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리드게이트가 준남작의 귀족 자제라는 사실에 매료되고 리드게이트는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춘 로저먼드가 자신의 반려자로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얼마 못 가 빚더미에 묻혀 파국으로 치닫는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대비 의료 수입은 변변치 않았고, 리드게이트는 새로운 의학연구를 하고 그걸 아내가 지지해 주길 바랐지만 로저먼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오만한 자존심을 꺾어가며 불스트로드에게 돈을 빌려보고자 노력하지만 오히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결국 도러시아의 바다와 같은 아량으로 결혼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여성이지만 로저먼드보다 리드게이트에 대해 더 공감하게 되었는데 아래의 문장을 읽으면서 옆에 로저먼드가 있다면 딱밤을 한 대 날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터시어스?” 로저먼드는 눈을 돌려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어 몇 개로 이루어진 단순한 말이라도 다른 언어 표현들과 마찬가지로 어조의 다양한 변화에 따라서 마음의 온갖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무기력한 아둔함부터 철저히 따지기 좋아하는 인식에 이르기까지. 로저먼드의 메마른 목소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라는 단어들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무관심을 집어넣었다. 그 단어들은 리드게이트의 마음에 일어난 애정에 치명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2권 p275
남편이 초대하지 말라고 했으나 굳이 또 귀족 사촌을 집으로 초대하고 임신 중이었음에도 그 사촌과 말을 타러 간 로저먼드.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화를 냈으나 또 말을 타러 나갔다 결국 유산까지 한 로저먼드였다.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고구마 같은 이 여자는 남편이 빚을 갚기 위해 결혼 전 구매한 가구들을 담보 잡혀야 된다고 하니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이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한 조지 엘리엇.
3. 프레드 빈시와 메리 가스
작품 속에서 가장 안정적인 관계인 두 커플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은 흔들림 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프레드는 로저먼드의 오빠다. 사치스럽고 철없는 건 오빠나 여동생이나 매한가지. 이모부가 유산을 물려줄 거라는 기대로 앞으로의 밥벌이에 대해 큰 생각 없이 살다가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자 어쩔 줄 몰라한다. 목사가 되기 위해 대학 교육까지 마쳤지만 큰 뜻은 없다. 사랑하는 메리의 남편이 되고자 하지만 그에 걸맞은 성실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리의 단호함에 이후 메리 아버지 관리감독하에 토지 관리인의 수업을 받으며 거듭난다. 책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메리의 외모는 평범하지만 실용적이고 자존감도 높은 인물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여성이다. 결혼 후에도 잘 먹고 잘 사는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커플이다.
그 외 주요 인물
4. 니콜라스 불스트로드
미들마치 캐릭터 중에서 가장 위선적인 인물이다. 미들마치의 부유한 은행가이자 신앙심이 깊은 그는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어두운 과거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마을에 파장을 일으킨다. 동시에 그의 악행이 밝혀지고 앞으로 남은 인생은 굴욕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그를 맹렬하게 비난하지 않고 옆에서 함께 울며 위로하는 아내가 인상적이었다.
정신적으로 다시 그 과거에 둘러싸여 불스트로드는 똑같은 것을 간청했다. —실은 지난 세월이 그 간청을 끊임없이 자아내어 커다란 거미집처럼 복잡하고 두껍게 만들어서 도덕적 감수성을 덧대었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이기심은 더욱 왕성해졌지만 즐거움은 더욱 줄었으므로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일을 했고 자신에게는 그 일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믿음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렇지만……. 만일 젊고 가난했던 머나먼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아, 그렇다면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선택할 것이다. 2권 p315
자신을 괴롭히는 빌런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가 죽기를 바라는 그의 심정을 보며 악인이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일정 부분 이해가 되기도 하여 나 스스로도 놀랐는데 번역가인 이미애님이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젊은 시절에 열렬한 신앙심으로 전도에 열중하지만 부정하게 남의 재산을 가로채고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한다고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위선자 불스트로드와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그의 고뇌에 공감은 아니더라도 이해와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작가로서 엘리엇의 강점이고 곧 그녀의 윤리 의식과 넓은 마음의 탁월한 성취라 볼 수 있다.
5. 케일럽 가스
등장인물 중 매우 비중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메리 가스의 아버지인 케일럽 가스는 토지관리인이자 건축업자이다. 나의 아버지였다 하더라도 존경스러워했겠지만 지나치게 정직한 나머지 무능하기도 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직업의식, 단순 돈벌이에 그치지 않고 소명감을 가지고 일하며 명예와 양심을 택한다.
직장생활 한 지도 벌써 23년이 넘어간다. 이쯤 나이가 드니 케일럽 가스와 같이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한편 위선과 탐욕이 가득한 미들마치에서도 꼿꼿하게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그가 매우 존경스러웠다. 불스트로드의 토지 관리인이 되어 일을 하다가 그의 부정이 드러나자 그를 탓하기보다는 손해를 볼지라도 일을 그만두는 아버지... 철도 건설을 반대하는 농부들을 어르고 달래며 상생을 도모하는 그가 가장 이상적이었다.
자네는 두 가지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해.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거야. 놀이를 시작하려고 일이 언제 끝나는지 늘 살펴서는 안 돼.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일을 부끄러워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명예로울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세. 자기 일과 그 일을 잘하기 위해 배우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저기 이러저러한 일이 있는데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더라면 아주 잘 해냈을 거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 2권 p222
케일럽은 손을 들어 올리며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은행장님을 평가하면서 ‘저 사람은 사악하고 나는 옳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치 않은 일이지요. 제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자기 의지로 그 잘못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결백해지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참기 어려운 벌이겠지요. 만일 은행장님의 사정이 그렇다면 저는 무척 안쓰럽게 느낍니다. 하지만 은행장님과 일을 계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불스트로드씨.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한 다른 일은 모두 잊겠습니다.” p440 (불스트로드의 악행이 드러나자 바로 손해를 감수하고 그의 일을 그만두는 기개가 대단... 동시에 그를 비난하지도 않고 그저 명예롭고 깔끔하게 거절하면서 마무리한다. 인간으로서 이보다 멋질 수 있을까)
이민진 작가는 『 미들마치』를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책을 읽기 전에는 그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읽고 나니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그저 후루룩 읽히는 문장이 없다. 굉장히 세밀하게 세공업자가 만든 보석을 보는 기분이랄까. 한 문장 한 문장 공들여서 관찰하고 쓴 것 같은 글이라 꼼꼼하게 읽게 되고 그/그녀의 감정 상태를 상상하게 된다.
"그의 경험은 가련한 것이었는데, 남들의 동정에서 몸을 사리며 그것이 알려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자만심이 강하고 편협하며 민감한 감수성은 질량이 크지 못해서 공감으로 바뀔 여지가 없었고, 자신에게 몰두하거나 기껏해야 이기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좁은 흐름 속에서 가느다른 실처럼 흔들렸다. p468"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속 좁은 캐소본이 느끼는 감정을 서술한 글이다.
그저 눈으로 휙 하고 읽을 수 없다. '민감한 감수성은 질량이 크지 못해서 공감으로 바뀔 여지가 없었고' 이런 부분.
원문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 쓰인 시기가 1870년대인 것도 놀랍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환경은 변하지만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지 않을까.
작품해설에 따르면 조지 엘리엇은 한 개인이 처한 상황을 세밀하게 그리면서 동시에 그런 상황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 그런 선택에 이르게 한 심리적 동인은 무엇인가를 파헤치며 심리적 사실주의 소설을 구축했다고 한다.
1856년에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예술의 위대한 기능"은 "공감을 확대하고 우리의 개인적 운명의 경계를 넘어 경험을 증폭하고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래서일까. 이기적인 캐소본과 로저먼드, 악인에 가까운 불스트로드까지 연민의 마음이 들게 한다.
결혼 생활을 앞둔 모든 이에게 필독서로 권장하고 싶다.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도 결혼 후에는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아마 그들도 결혼 후 상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상대방도 다른 자아이며 또 다른 생각을 자신에게 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며 당황했을 수 있다. 그러나 관계 회복을 위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연민을 배우지 않았을까.
150여년 전 쓰인 글이지만 현재에도 유효하다.
고전을 읽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이민진 작가님이 왜 수백번 읽었다고 하는지 너무 잘 알겠다.
밑줄 그은 구절
1권
우리 생활에는 하찮은 구석이 전혀 없을 거야.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일 테니까. 파스칼과 결혼하는 것과 같겠지. 위대한 사람들이 진실을 보아 온 빛으로 나도 진실을 보게 될거야. 그러면 내가 나이 들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겠지. p50
도러시아는 너무나 어린 아이 같았고, 매우 영리하다는 평판이 있기는 했지만 어떤 사람들의 판단에 따르면 너무나 어리석었다. 예컨대 바로 지금처럼, 비유적으로 말해서 캐소본씨의 발밑에 몸을 던지고 그가 청교도의 교황이라도 되는 양 그의 멋없는 구두끈에 입을 맞춘 이 경우에도 그러했다. 그녀는 캐소본 씨가 그녀에게 걸맞는 좋은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도록 일깨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캐소본 씨에게 걸맞은 좋은 사람이 될지를 염려하며 자문했을 뿐이다. p87
남자건 여자건 우리 인간은 아침 식사와 정찬 시간 사이에 수많은 실망감을 삼키곤 한다. 눈물을 참고 약간 핏시가 사라진 입술로 누군가 묻는 말에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라고 대답하곤 한다. 자존심이 우리를 돕는다. 우리가 입은 상처를 숨기라고 촉구할 때의 자존심은 나쁘지 않다.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p107
그 말을 받은 치첼리 씨는 중년의 총각으로 토끼 사냥의 명수였다. 얼굴빛은 부활절 달걀 같았는데 몇 올 되지 않는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정리했고, 그의 태도는 두드러진 외모를 의식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p155(얼굴빛 부활절 달걀 ㅋㅋㅋㅋ 몇올 되지 않는 머리카락 세심하데 정리 ㅋㅋ 이 치첼리가 여자 외모를 매우 중요하게 보는 사람임)
불스트로드 씨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그럴 기회를 거의 놓치지 않았는데 빈시 씨는 그만큼 참을성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p219(이 문장 너무 우낌 ㅋㅋㅋ 우리 남편이 연상됨…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그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ㅋㅋㅋ)
리드게이트의 자만심은 오만하고, 결코 히죽거리지 않고, 결코 무례하지 않지만, 그 권리 주장에 당당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을 경멸하는 것이었따. 그는 멍청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그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자신이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을 것이다. p256
사람의 자기 만족이란 세금이 붙지 않는 재산과 같아서 그것이 무시되면 불쾌하기 짝이 없다. p267
어쩌면 그런 의식 때문에 천국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가정에서 드러내는 태도는 개선되지 않고 숭고한 목적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가혹한 비판에 약간 도전적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p302
성 보톨프 교회의 목사는 바리새인의 티를 한 점도 지니지 않았음이 분명했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스스로 인정했기에 바로 그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 p318
만찬 식탁에서 재기를 반짝이던 사람과 한집에서 생활할 때 혹은 여러분이 좋아하던 정치가가 내각에 들어갈 때도 이처럼 신속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처음에 아는 것은 거의 없고 믿음은 많은 상태로 시작했다가 때로는 결국 아는 것은 많고 믿음은 없는 상태로 끝나게 된다. p334(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사랑하는 도러시아, ‘회개를 듣고도 마음을 풀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도 땅에서도 살 수 없다.’ 라고 했소. 당신은 내가 그런 가혹한 형벌을 받아 추방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p357
신이 브룩 양을 캐소본 씨에게 선물하셨을 때 그녀에 대해서도 똑같이 배려하셨겠느냐는 물음은 캐소보 씨의 마음에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매력적인 아가씨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자질을 지녔는지 생각해 보라고 사회가 터무니없이 요구한 적이 없었다. 마치 남자는 아내를 선택할 뿐 아니라 그 아내의 남편도 선택할 수 있는 듯이! p467
그의 경험은 가련한 것이었는데, 남들의 동정에서 몸을 사리며 그것이 알려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자만심이 강하고 편협하며 민감한 감수성은 질량이 크지 못해서 공감으로 바뀔 여지가 없었고, 자신에게 몰두하거나 기껏해야 이기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좁은 흐름 속에서 가느다른 실처럼 흔들렸다. p468(찌질한 캐소본을 문학적 언어로 표현한. 홍상수 영화 캐릭터 같다)
나는 쓰라린 입천장이 모래를 찾아내듯이 불편한 의식은 빈정거림을 알아듣는다는 격언이 ‘솔로몬의 잠언’에서 누락되었다고 생각한다. p499
우리 모두 그렇듯이 그도 자기 내면에서 일어난 분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p547
가엾은 크랜치 부인은 체구가 크고 천식을 앓아 숨을 몰아쉬는 데다 자기 말을 유별난 것이 아니라 일반적 취지로 전달할 이유가 있었으므로 속삭이는 소리도 망가진 손풍금처럼 큰 소리로 갑자기 터져 나오곤 했다. p554
우리가 어떤 불편한 질투심을 느끼는 성향이 있으면 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만일 우리가 대체로 굴을 파고드는 재능을 가졌다면 꿀을 홀짝이고 있는 (우리가 반감을 느낄 만한 심각한 이유가 있는) 사촌은 우리를은밀히 경멸할 테고, 그 사촌을 칭찬하는 사람은 누구든 간접적으로 우리를 비판하는 것이 된다. 우리 영혼에는 올바름이라는 도덕관념이 있으므로 그에게 해를 입힐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권리 주장을 전부 들어준다. 그를 위해서 수표를 써 주면 그가 우리의 우월함을 인정해야 하기에 우리의 쓰라린 마음이 약간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p597
작은 시골 땅이라도 사람들이 말하듯이 양호한 상태로 만들고, 사람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하고, 훌륭한 발명품과 견고한 건물을 조금이라도 만들 기회를 얻는 것 말이오. 지금 사는 사람들과 나중에 올 사람들이 그 덕분에 더 나은 혜택을 받도록 말이지. 난 많은 재산보다 그런 일이 더 좋소. 그런 것이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p668
서로 너무나 다른 두 남자는 메리가 스스로를 묘사했듯이 이 “누르스름한 누더기”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의 마음을 끈 것은 분명 평범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평범한 아가씨들은 미모의 결핍에 자신감을 가지라는 사회의 위험한 권고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라). 이 연로한 나라에서 인간은 대단히 경이로운 통합체이고, 오랫동안 주고받은 영향력들이 서서히 창조해 낸 존재다. 그리고 매력이란 그러한 두 통합체, 사랑하는 존재와 사랑받는 존재가 만들어 낸 결과다. p678
우리 눈 가까이 있는 작은 얼룩은 온 세상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지워 버리고 그 얼룩을 볼 여지만 남기지 않을까? 내가 알기로는 사람의 자아처럼 골치 아픈 얼룩도 없다. p697
우리가 충족하려 애쓰는 욕구는 비록 그것을 요원한 희망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실은 즉각적인 욕망이다. 우리가 도시의 좁은 길에서 고되게 일하며 얻으려는 미래의 장원은 이미 우리의 상상과 사랑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캐소본 씨의 즉각적 욕망은 지상의 환경을 벗어난 신성한 교감과 빛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열렬한 갈망은 아주 어둑한 곳에 안개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p705
2권
현명한 사람이 되려면 너무 성급하게 설명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성급히 설명하다 보면 실수의 원인이 몇 배로 증가하고, 그 총합이 늘어나서 그것을 따져 본 사람은 틀림없이 오판하기 마련이다. p32
조심해요. -익스페르토 크레데(Experto Crede)- 돈 문제로 곤란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예전에 당신이 흘린 말에서 내가 돈을 따려고 카드 놀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소. 그 부분에서 당신의 생각은 대단히 옳아요. 하지만 푼돈이 부족해서 그걸 바라는 일이 없도록 해요. 어쩌면 이런 말이 불필요하겠지.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나쁜 점을 예로 들어 설교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기 좋아한다오. p50
청춘이 희망의 계절이라면 그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품는다는 의미에서만 종종 맞는 말이다. 젊은이들처럼 자기네 감정과 이별과 결심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느끼는 나이대도 없으니 말이다. 위기에 처하면 처음 겪는 것이기에 모두 최종적으로 여겨진다. p198
자네는 두 가지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해.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거야. 놀이를 시작하려고 일이 언제 끝나는지 늘 살펴서는 안 돼.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일을 부끄러워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명예로울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세. 자기 일과 그 일을 잘하기 위해 배우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저기 이러저러한 일이 있는데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더라면 아주 잘 해냈을 거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 p222
여러 해에 걸쳐 다정한 애정이 우리 마음에 쌓여 왔을 때 그 대신 다른 애정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우리 인생을 값싸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보물을 지키듯이 우리의 애정과 변치 않는 지조에 불침번을 세워 지킬 수 있다. p252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터시어스?” 로저먼드는 눈을 돌려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어 몇 개로 이루어진 단순한 말이라도 다른 언어 표현들과 마찬가지로 어조의 다양한 변화에 따라서 마음의 온갖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무기력한 아둔함부터 철저히 따지기 좋아하는 인식에 이르기까지. 로저먼드의 메마른 목소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라는 단어들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무관심을 집어넣었다. 그 단어들은 리드게이트의 마음에 일어난 애정에 치명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p275
무뚝뚝하고 찌무룩한 사람이라면 장화 벗는 기구부터 베르헴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의 장점을 끊임없이 열거하는 일을 싫어할 수 있겠지만 보스롭 트럼블 씨는 상쾌한 액체가 핏줄에 흐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경탄하기를 좋아했고, 그의 나무망치 밑에 온 우주를 놓고 경매할 수 있었더라면 좋아했을 테고, 그의 찬사 덕분에 우주가 더 비싼 값에 팔릴 거라고 느꼈을 것이다. p294
정신적으로 다시 그 과거에 둘러싸여 불스트로드는 똑같은 것을 간청했다. —실은 지난 세월이 그 간청을 끊임없이 자아내어 커다란 거미집처럼 복잡하고 두껍게 만들어서 도덕적 감수성을 덧대었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이기심은 더욱 왕성해졌지만 즐거움은 더욱 줄었으므로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일을 했고 자신에게는 그 일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믿음에 흠뻑 젖어 들었다. 그렇지만……. 만일 젊고 가난했던 머나먼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아, 그렇다면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선택할 것이다. p315
다시 나타날 거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않을 때 다시 나타나면 사람의 품위가 확실히 손상된다. 첫 번째 작별 인사에는 비애감이 있지만, 두 번째로 작별 인사를 하러 가면 희극이 시작된다. p330
우리 인간이란 무척 기묘한 존재라서 그는 목사를 은밀히 도왔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뿌듯해했으면서도 목사가 이제 자기를 도와줄 필요를 느꼈다는 암시를 내비친 것만으로도 몸을 사리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p361
케일럽은 손을 들어 올리며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은행장님을 평가하면서 ‘저 사람은 사악하고 나는 옳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치 않은 일이지요. 제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자기 의지로 그 잘못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결백해지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참기 어려운 벌이겠지요. 만일 은행장님의 사정이 그렇다면 저는 무척 안쓰럽게 느낍니다. 하지만 은행장님과 일을 계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불스트로드씨.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한 다른 일은 모두 잊겠습니다.” p440
케일럽 가스가 그의 과거를 알고 후원을 거부했다는 사실에서 그가 움츠리며 느낀 굴욕감은 래플스가 이야기를 털어놓은 상대가 다른 사람이 아닌 가스였다는 사실에서 느낀 안도감과 교차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그리하여 비밀을 유지하려는 희망의 길이 열렸고, 그것은 더 나쁜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구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보여주는 전조 같았다. p442
이른 오후에 아치형 입구에 한가로이 서 있는 사람은 먹을거리를 찾은 비둘기처럼 동무들을 금세 끌어들일 것이 분명했다. 이 경우에 물질적인 음식은 없었지만 합리적인 눈으로 보면 잡담이라는 형태의 정신적 양식이 있을 가능성이 엿보였다. p471
괴로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라. 이 떠도는 고뇌가 당신과 나를 찾아올 수 있으리. p506
미들마치의 어법으로 보자면 솔직하다는 말은 일찌감치 기회를 잡아서 친구들에게 그들의 능력이나 행동, 지위에 대해 당신이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는 뜻이다. p513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면 우리는 그들의 본성을 통해 일종의 세례를 받고 깨끗이 정화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우리에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우리를 정직과 순수에 묶어 놓았으므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최악의 신성 모독이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만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없어요.” 이런 사소한 말들이 책임감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양심의 가책에 통렬한 고통을 수반하게 할 것이다. p562
알다시피 루비콘강은 실제로 보면 대단치 않은 개울에 불과하다. 그 의미는 보이지 않는 어떤 상황에 달렸다. 윌은 경계선을 이룬 자기만의 작은 도량을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한다고 느꼈다. 그 너머에서 보이는 것은 제국이 아니라 불만에 종속되는 삶이었지만. p612
세상의 점진적 개선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위 덕분이기도 하고, 당신이나 내가 처한 상황이 대단히 나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충실히 무명의 삶을 살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많은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다. p6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