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데 떠나는 걸 보는 것은... 마음이 좋지 않다.
촉촉히 젖은 눈시울을 연신 노란색 손수건으로 찍어 닦으며 시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내와의 급작스러운 이별에 대한 애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딸의 미국 이민까지.
칠순이 넘은 아버지가 받아들이시기엔 어렵지 않을까.
시댁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당시에 시이모님까지 계셨으니 집안이 복닥복닥 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시누네를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단촐해진 가족수에 마음 한 켠이 빈 것 같았다.
언니는 아버지를 보면서 복받치는 감정을 눈물로 대신하고 아버지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셨다.
고모부는 그런 언니의 등을 토닥이고, 언제나 데면데면한 남동생의 전형적인 타입이었던 남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아 역시 가족이구나. 피는 진하구나. 남편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목 안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나오며 코 끝이 찡해지긴 했지만 눈물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나 자신을 느끼며
만약, 내 여동생이 이민을 가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는 다른 감정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현실적으로
우리가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아니지만
시누네가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욱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책무가 머릿 속에 떠올랐고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그래서 저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편이 집에 가서 간단히 먹자(밥을 하고 국을 데우고 등등)라는 제안은 귓등으로 들리고
구원처럼 아버지가 을밀대의 냉면을 먹자고 하셔서 잠자코 있었다.
시누네 이민가기 전까지
주말 마다 약속이 엇갈리고 며느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몇 가지 상황들이 벌어져서
남편과 투닥거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마지막이고 이제 다시금 그런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9년간의 결혼생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무엇인지.
인간의 계획이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깨닫고 있다.
영주권을 신청한지 13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3년이 흘러서야 이민을 가게 하신 것도
다 그 분이 뜻한 바가 있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