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한테는 미래에 잔뜩 가위눌려 있는 인간,
이 땅에 금방이라도 천국이나 지옥이 임할지 모른다는 환상에 사로 잡힌 인간,
그래서 천국을 얻을 수 있다거나 지옥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원수의 계명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
자기는 생전에 보지도 못할 계획의 성패 여부에 믿음을 거는 인간이 최고지.
우리가 바라는 건 전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C.S 루이스
출장 온 동료가 고맙게도 내 생각이 났다면서
간식거리를 챙겨들고 나를 찾아주었다.
제주가 고향인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시집 왔던 그녀.
역사를 전공하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지적인 그녀와 일리 카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벌써 2년 전.
제주에서 살았던 게 꿈 같아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그러세요.
지나고보니 정말 좋은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너무 정신없게만 살았던 것 같아요.
나의 후회섞인 말에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보며
신중하면서도 배려 깊은 말투로 '아이 둘을 보느라 힘드셨었겠죠.' 라고 답해 주었다.
그저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뿔테 안경 너머로 밝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아. 진심이다. 라는 생각이 스치며 마음 한 구석 따스함이 천천히 밀려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서로의 안부를 간단히 주고 받으며
다음에는 꼭 식사를 하자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오늘은 야근을 하려고 생각했었는데
바짝 정신을 차려 문서의 개요를 이면지에 정리하고
노트북 가방을 둘러메고 칼퇴근을 했다.
열이 나서 어린이집에 오지 못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일은 아이들을 재워놓고 해도 되니까.
나는 항상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지시하는 마감시간에 압박을 느끼며 별거 아닌 것에도 최소 2일 전에는
마무리 해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집안 일을 그렇게 챙겼으면 남편이 좋아했겠지)
사실 돌아보면 내 불안이 만든 덫 같은 것이었다.
제주에서의 그 아름답던 시간들
지나고나니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여유롭게 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초조했고 불안했으며 뭔가 달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운 마음에 잠을 이루지도 못했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도 한 줄 한 줄 재미나게 읽어주기 보다
'대체 언제까지 읽어달라고 하는걸까' 하는 마음이 더 컸고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다가도 서울에 동료들은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겠지..
평온하고 고요한 하루에 감사함은 잠깐, 죄책감을 더욱 느꼈던 듯 하다.
스크루테이프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정말 미래에 잔뜩 가위 눌려서는 현재의 선물을 차곡차곡 제단에 쌓아놓고 살았던 것인데.
제주에서 온 그녀를 만나자
파노라마 사진처럼 그 멋진 하늘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막 내린 커피 냄새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
눈이 소복히 내린 한라산을 보며 연신 감탄 했던 기억들이 생각났다.
그 소중한 것들을 마음 편하게 늘어지게 즐기지 못했던 안타까운 기억.
그래서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방을 둘러메고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샤워를 마친 시경이가 촉촉한 머리를 날리며 '엄마'하고 달려온다.
새로 사 준 엉덩이 탐정 책이 너무 재밌다며. 마법천자문 보다 재밌다면서
엉덩이탐정이 척척 해결하는 사건에 대해 종알종알 이야기 해주었다.
38도를 오르내리는 시성이는 목이 부어서 너무 아파서 말을 할 수 없다며 피곤해 하고.
야근을 한다고 늦게 왔더라면
2016년 09월 06일 화요일 오후 8시,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시간의 주자매들을 보지 못했을 것 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했다.
피곤해 하는 아이들과 같이 자리에 누워 기도를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쑥쓰럽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