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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82년생 김지영

by 와락 2017. 4. 21.


전혀 소설 같지 않았다.

친구 이야길 듣는 기분, 중간 중간 나도 겪었었던 혹은 현재도 진행 중인 미세한 차별과 폭력

또 한편 멋모르던 시절, 명예남성으로 살고 있는 언니들을 보며 롤모델로 삼고자 노력하진 않았었던가 돌아보기도 하고


좋아한다면서 괴롭히고 놀리던 국민학교 때 남자 짝꿍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에 돌아오는 길 집요하게 따라 붙던 중학교 오빠. 

가슴이 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얼굴이 발개지던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

처음 생리 시작했을 때의 불편함.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았다. 대부분 축하를 받았구나. 

아마 엄마는 이 힘든 것을 생각보다 빨리 시작한 마음에서 나온 안타까움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엄마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첫 입사한 회사에서 나에게 직원들의 책상을 아침마다 닦으라고 하셨던 총무과장님과 그에 맞서

청소하러 회사 들어온게 아니라고 나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했던 차대리님이 생각이 났다. 

성희롱인듯 아닌 듯(명백하게는 성희롱이지만) 한 상황에서는 그저 웃어넘겨야 했던 일들 

클라이언트가 나를 얼싸안으려 하는 상황에서 나를 지켜줬던 선배 언니들 


상견례 때 집안 일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어깨를 움추리며 말하신 친정엄마와

괜찮다고 하면서도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 하면서 서서히 배우면 된다고 하셨던 시어머니


소설 속 김지영이 겪은 대다수의 일들은 내 삶의 일부였다. 







밑줄 그은 구절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리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p37



잘될 거라는 막연한 낙관도, 그깟 취직 좀 늦어지면 어떠냐는 무책임한 위로도, 왜 이 정도 스펙밖에

갖지 못했냐는 흔한 질타도 하지 않았다. 준비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돕고,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술을 사 주었다. p105 



서운함은 냉장고 위나 욕실 선반 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계속 무심히 내버려두게 되는

먼지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두 사람 사이에 쌓여 갔다.p119



남자 신입 사원들이 선발된 이유는 장기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대표는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원 복지에 힘쓸 계획은 없다.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의 판단이다. p123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p149 



입사 동기 강혜수 씨가 하루 휴가를 냈다며 아이 내복, 기저귀 그리고 립글로스를 사 들고 

김지영 씨의 집에 놀러 왔다. "립글로스는 뭐야?" "나 지금 바른거, 색깔 괜찮지? 우리 피부톤 비슷해서 잘 받는 색도 비슷하잖아."  엄마도 여자라거나, 집에만 퍼져 있지 말고 좀 꾸미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한다. 끝. 깔끔하다. p152



아이의 산만함과 아내의 출근에는 전혀 인과 관계가 없어 보였지만, 담임은 저학년 때만이라도 엄마가 곁에 있어 주라는 처방을 내렸고, 아내는 일을 쉬기로 했다.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아이의 아침을 차리고, 아이를 일으켜 깨워 직접 씻기고, 먹이고, 옷을 입히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집으로 미술과 피아노 선생님을 불렀다. 밤이 되면 아이 방에서 아이를 옆에 끼고 잤다. 아이만 괜찮아지면 다시 일하겠다고, 선배에게 얘기해 자리도 다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아이가 좀처럼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며 선배에게 취소 전화를 걸었다. p172




처음에는 한두 달 쉬면 되지 굳이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언짢았는데, 생각해 보니 출산 때 또 자리를 비울 테고,

그 이후에는 몸이 아프네 애가 아프네 하면서 번거롭게 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지 싶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p175





엄마가 되면서 개인적 관계들이 끊어지고 사회로부터 배제돼 가정에 유폐된다. 

게다가 이이를 위한 것들만 허락된다. 아이를 위해 시간.감정.에너지.돈을 써야 하고,

아이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엄마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면 엄마의 자격을 의심 받는다.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아이를,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라

사회의 의무인데, 개별 가정에서 대부분 엄마가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p188 




김지영은 어떻게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읽은 '82년생 김지영'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82년생 김지영 혼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함께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