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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피아노를 다시 칩니다

by 와락 2025.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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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일만 하고, 모든 것에서 쓸모만을 찾던 우리들…… 이제 쓸모없는 일을 해 봅시다. 그것이 당신의 삶을 바꾸어주고, 여유 있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도록 해줄 것입니다. 클래식을 듣는 것은 실로 쓸모가 없기 때문에 가치로운 일입니다.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 박종호





퇴근길이었다.
판교역 근처에 성인을 위한 피아노 학원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굳이 이 나이에, 손도 굳었는걸’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나갔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홀리듯 상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학원에 들어갔고 한 달 정도 이용료와 일부 레슨비를 내고 등록했다. 나를 위해 쓰는 비용은 늘 고심하지만 돌아보면 아이들 주 1회 가는 과학학원비보다는 저렴했다.

뚱땅뚱땅
피아노는 손을 대면 음이 눌러지고 소리가 나기 때문에 쉬워 보이지만 귀가 열리고 이 소리가 그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울수록 알게 되므로(모든 악기가 그렇겠지만요) 기쁘면서 괴롭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예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지며 굳어 있던 손가락이 반응하는데 얼마 전 읽은 피아노와 관련된 뇌과학책에 의하면 11살 이전에 피아노를 치게 되면 뇌의 수초가 많아진다고 한다.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랄지. 그건 나이가 들어서 훈련을 할 수 있지만 뇌의 수초를 키울 순 없다고. 그래서 어릴 적 음악을 시키라고 하나보다.

어느 날 애플뮤직에서 우연히 바흐의 골드베르크 연주곡을 듣게 되는데 첫곡인 Aria를 듣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 힘들날이었을게다. 피아니스트를 보니 글렌굴드. 천재 피아니스트였다고 한다.

이 피아니스트의 연주곡을 듣다 베토벤 소타나 12번을 듣게 되었는데 그날은 정말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이 갱년기가 왔냐고 묻는데 마흔 중반이면 좀 이른 게 아닐까 싶으나 어쩌면이라는 물음표도 생겼다.

그래서 쇼팽의 왈츠 19번을 손 풀기처럼 처음 한 달 연습해 본 후 바로 베토벤 소나타를 시작했다.

몇 년 전 주자매를 위해 구매한 디지털 피아노 위에 먼지가 쌓여갔는데 최근에서야 내가 활용을 하고 있다. 당근에 팔아야 하나 고민했던 남편은 드디어 피아노의 쓸모와 쓰임에 흡족해하고 있다.



잘 알지 못해도 꾸준히 KBS1FM을 들어온 탓인지 아주 낯설지는 않다. 글렌굴드와 우리의 자랑스러운 임윤찬,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 쓸모없지만 가치 있는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

1월 1일에는 오선지를 출력해서 낮은 음자리계이름을 연필로 일일이 적기도 했다. 프린트하면 그만이지만 손으로 써가고 불러가는 것만큼 기억이 되는 것도 없다.

덕분에 악보를 보는 게 좀 더 수월해지는 중이다.




연말에 피아노 연습을 하러 갔는데 학원 홀에서 작은 공연도 펼쳐졌다. 모두들 진심이다. 나도 올해 연말에는 무언가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매일의 내가 조금씩 갱신되는 모습이 반갑다. 달리기, 근력운동, 필라테스, 피아노
모두 다 똑같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바로 퇴보한다.
그리고 들인 노력의 1/2 수준으로 성장하는데 그 과정이 좀 지난하긴 해도 결실은 뿌듯하다.

오늘도 레슨이 있다.
연말 연초 울적한 나를 지탱해 준 것은 피아노인데 선생님께 점검받으러 가는 날은 긴장된다.
베토벤 소나타 12번 전곡을 잘 치게 되기를.

언젠가는 이 홀에서 칠 수 있기를
업라이트 피아노 소리가 좋습니다. 피아노는 영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