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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이사의 미덕

by 와락 2013. 2. 9.


이사의 미덕은 모든 것을 '제로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과의 교제, 인간관계,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들, 그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말끔히 소멸해버린다. 이때 맛보는 쾌감은 한 번 익히고 나면 평생 잊을 수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이사 온지 보름 정도 지났다. 

흥분을 가라앉힐 틈 없이, 이삿짐을 정리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나니 남의 집 같이 느껴지던

이 공간이 이제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음씨 좋은 주인분들 덕에 전에 있던 집에서도 우리는 잘 지냈던 편이지만,

매번 밤마다 주차문제로 은근 스트레스 받던 남편은 곳곳에 비어 있는 주차공간을 보고 해방감을 느끼고,

나는 비록  앞집 아파트 베란다가 보이지만 적어도 벽보단 낫다며 '뷰'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고,

엄마는 윗풍이 없어 어깨가 덜 시렵다고 하고, 아이들은 넓어진 본인들의 놀이 공간과 욕조에서의 목욕을 즐기고 있다.



회사에서의 일은 아직 손에 익지 않아 서툴고,

예상했던 대로, 전에 하던 일 보다야 '재미'있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다. 성취감을 얻기 위해, 찾아보는 중이다. 




익숙했던 모든 것과 결별하고, 

제로화에서 시작하는 삶은 설레고, 기분좋은 흥분이 계속 된다. 

지난 보름 간, 우리 가족은 제주에서의 일상적인 모든 것에 감동하고 감탄했다. 

계속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다, 햇빛이 살짝 비추기만 해도 '저 하늘 좀 보라'며 격앙된 몸짓으로 창문을 가리키고,  오일장에서 제주산 브로컬리를 한 바구니에 5천원에 사고서는 하루 종일 브로콜리 찬양가라도 부를태세로 이야길 하고, 서귀포의 물회집 앞에 바다를 보며 '정말 바다야.'라며 촌스럽게 사진을 찍어 댔다. 




그리고, 참으로 간사하게도 

보름 정도 지나자 이런 행복을 공기처럼 느끼며, 잠시 한 걸음 비켜서 찬찬히 돌아보고 있다. 

돌이킬 수도 없는 지금 다시 반문해 본다. 


'우리 잘 내려온게 맞겠지?' 



꺄르르,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웃어대는 두 아이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그래, 당분간은 후회 하지 않을 것 같다. 

남편도 알겠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을 하지 않은 불안함은 오롯이 그의 몫이니. 

지금 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수 밖에. 







회사 창문에서 본 무지개, 몇 십년만에 첨이다. 




주시경과 돌하르방. 집에 갈 때 '다음에 또봐요 할아버지' 라고 함. 



수목원에서 씬나게 걸어요. 



목욕은 즐거워 





아이들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월을 비껴갈 수가 없음을 매번 느낀다.

커가는 만큼, 나도 나이를 먹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