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간 늑대와 동거한 괴짜 철학자가 있다.
개도 아닌, 늑대라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는 늑대형제(브레닌)을 통해 철학자로서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우리 영장류의 삶을 되짚어보고, 기존과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특히, 삶의 의미란 목적이나 목표, 소유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살면서 만나는 특정한 몇몇 순간의 그림자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최고의 순간에 대한 오해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철학서라고 해서 좀 부담스럽게 생각했는데,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특유의 유머에 낄낄 거리기도 하고.
시간적인 존재로서 직선 위의 삶을 살며 쉼 없이 목표와 계획을 향해 달려가는 영장류와 달리
둥그런 곡선 위의 삶에서 순간순간을 완전하게 살아가는 늑대.
어떤 삶이 더 나은가를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면 과거를 후회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우리들이 걱정이나 염려는 버려두고, 늑대와 같이 순간에 충실하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순간’이 우리가 조건반사처럼 생각하는 행복.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는 그 순간 만이 아니라
가장 불쾌할 수도 있는, 삶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삶을 향해 두려움 없이 '으르렁'거리며.
#밑줄 그은 구절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존재를 오직 비용-편익의 관점으로만 보는 성향,
누군가의 삶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계량화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성향은 오직 영장류만 가질 수 있다. 모든 영장류 중에서도 이 성향이 가장 복잡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p21
불만의 많을수록 더 사악해지고, 화해에 무감할수록 정의는 더욱 필요해진다.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영장류만이 도덕적 동물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불만으로 가득하다. p112
출중한 외모와 친근하면서도 점잖은 태도 때문에 마젤라 주지사는 브레닌을 특별 대우했다.
그러나 브레닌이 경솔하게도 몰래 주지사의 장바구니를 뒤져 냉동닭을 게걸스레 먹어
치운 사건으로 인해 이런 특별 대우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p 160
경솔한 브레닌이 귀엽고, 작가의 애정이 묻어나는 문장.
분별 있는 교양인에게 행복은 섹스나 만약, 그리고 술을 통해서만 느끼는 감정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더욱 중요한 감정을 인식한다. 스텔라 맥주를 진탕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는 즐거움은,
이제 품질 좋은 라투르 와인 한두 잔을 음미하며 느끼는 미묘한 전율로 격상된다.
그리고 가끔씩 하룻밤 풋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격정은 '진지한', 그리고 성행위의 수준에서
본다면 사실상 거의 형제자매와 같은 관계에서 느껴지는 더욱 절제된 즐거움으로 대체된다. p207
나는 이 부분에서 계속 킥킥 거렸음. 절제된 즐거움이라니 아항항항하
자연스럽게 삶의 의미를 우리가 목표로 하고 바라보는
어떤 것이라고 간주하여 시간이 한참 지나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은 항상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순간에 있지 않다고 본다. p289
시간의 화살에 매료되고 혐오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 인간들은 그 혐오감으로 인해 시간의 화살에서
일탈하는 새롭게 다른 것들에서 기쁨을 찾는다. 하지만 화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일탈을
꿈꾸게 하는 동시에 또 다른 일직선을 만든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 추구는 뒤로 헛걸음질 치는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 일직선의 끝에는 항상 '다시는 없으리'만 존재한다.
명백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나 오지도 않을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말도 안 되게 많은 시간을 할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스꽝스럽게도, 우리는 기억된
과거나 욕망하는 미래를 현재라고 부른다. 시간의 피조물은 순간의 피조물과는 달리
노이로제에 걸린다. (중략) 다시 말해 우리는 순간 자체를 보기보다는 순간을 통과해서
보는 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의미 있기를 바라지만 그 의미가
어떻게 생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성은 인간에게 이해할 수도 없는 대상을 향한
욕망을 안겨 주었다. p306
희망이란 인간 실존의 중고차 판매원이다. 너무나도 친절하고 너무나도 그럴듯하지만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난 희망 끝에 남겨진 내 자신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시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 갈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성실함과
행운으로 이루어 낸 모든것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 실재하는 내 모습만큼은
시간이 결코 앗아 갈 수 없다. p326
나는 절대 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다른 이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나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장류의 근본적인 오점인 이기주의의 오류에 직면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최상의 상태에 내가 어떤 존재였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상태에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최상의 순간들이라는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드러난다.
하지만 내 순간들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가 진실로 혼자일 때, 불독에게
짓눌린 힘없는 새끼 늑대와 같은 존재일 때조차도,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닌 불독이다.
우리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두려운 순간들은 좋은 것이든 악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된다. 나의 순간은 무리의 순간이며 나는 무리를 통해서만 나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 p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