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쓰기 T를 완료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왜 하느냐고 여러 차례 만류/비난 하던 가족들은
이제 내가 책상에 앉으면 '사전하려고?' 라고 묻는다.
남편은 성경필사처럼 마음수련을 위한 '행위'라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어찌 되었든
금요일 밤, 맥주를 두 어 잔 하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준 후
방에 들어가 토닥토닥 재워놓고 11시에 거실에 나와 피터 드러커의 책을 몇 장 펼쳤다 덮은 후
책상에 앉아 사전을 펴고 다시 단어를 옮겨쓰기 시작.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무한도전 이전의 무모한 도전을 애정한 시청자의 애티튜드로
겁도 없이 사전 읽고 쓰기에 도전한 것 같다.
돌이키기엔 그만두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김영하 작가는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깝지도 않냐.라고 동기들이 입을 모아 충고할 때
"아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아까워.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라고 했다는데
난 그런 용기가 없다. U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더 가는 수 밖에.
오늘 쓴 단어 중 Type A 와 TypeB 가 있었다.
Type A : A형 행동양식의 사람, 경쟁심이 강하고 성마르며 긴장형인 사람. 관상동맥계 병을 일으키기 쉬움.
Type B: B형 행동 양식의 사람. A형과 반대로 유유자적하고 느긋함.
Type A를 쓰며 혼자 큭큭 거렸다.
관상동맥계 병에 쓰이는 콩코르정 약을 7개월째 복용하고 있는 나야 말로 전형적인 A형이구만.
아이고 배야.
나와 반대인 Type B의 대표적인 예는 정지인데 우리가 잘 지내는 것도 신기하다.
물론,극단적인 나와 정지 사이에 오양이 자리 잡고 밸런스를 맞춰주기 때문이겠지만.
좀 삐뚤어질지언정 트라이앵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우리 셋은 16년을 맞아 모임을 가졌다.
분기에 한 번 만나기도 정말 어려워졌다. 99년도에는 3일만 안만나도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했었는데.
16년 전 꿈꾸었던 커리어우먼과의 모습과 조금씩 비켜나긴 했지만
아직은 나름 돈을 버는 직장여성들이므로 멋지게 스카이라운지에 가기로.
신난다. 신난다. 창가자리로 예약을 하고, 지하철역 근처에 픽업을 나온 오양의 차를 타고
룰루랄라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며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아하하 아하하. 출구를 못찾아 약간 헤맸지만 괜찮아 괜찮아.
꼭대기층을 누르며 아 좋구나. 우리 회사 오래 다니자. 다짐을 해가며.
벌써 몇 년전이냐. 선릉역 근처 멀지 않은 곳에서 회사 다닐 때
점심 시간에 만나 6천원짜리 밥 먹고, 후식으로 뚜레주르에서 빙수 먹은 후
후다닥 각자의 회사로 달려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능숙하게 와인리스트에서 와인을 고르는 정지와 오양을 보니
종로 피맛골에서 남친과 헤어졌다고 진상을 부리며 매실주를 먹던 그 옛날이 생각나고.
아. 우리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지난 번 들은 강연에서 서은국 교수님이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하셨다.
저명한 심리학자에 의하면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동료의 매직 넘버는 세 명이고.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멋진 야경을 보면서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은 날.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주자매 열을 재고 코를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나란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 덕분에
주자매의 맹공격에도 '엄마' 이전의 '나'의 존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저 감사할 뿐.
그리고 호텔은 언제나 옳다.
반짝거리는 야경. 삼성동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식전 빵과 화이트와인. 맛있네요. 맛있습니다.
스테이크와 라자냐, 파스타
미디엄웰던을 주문하여 정지 표정이 흑빛이 되었지만. 촌스러워 미안.
터닝메카드를 보고 심취해 있는 둘째, 메카니멀이 되어 작전 수행 중.
엄마는 와인과 스테키를 먹는 동안 메카니얼 변신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
애들아. 엄마도 너희들 처럼 친구들이랑 가끔은 맛난 것도 먹고 놀아야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