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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이사가 준 선물

by 와락 2016.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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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출발이라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

한낮의 햇빛이 커튼 없는 창가에 눈부신

어느 늦은 오후 

텅 빈 방안에 가득한 추억들을 세어 보고 있지,

우두커니 


전부 가져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너의 기억들을

혹시 조금 남겨두더라도 나를 용서해, 

날 미워하지마 

 - 윤상 '이사' 중에서 - 




지난 일요일 이사를 했다. 

인테리어를 마치고 청소를 할 때는 아 깨끗해서 좋구나 정도였는데 

실제 이사를 하고  붙박이장 마다 살림살이를 넣고 새로 산 가구들이 배치되자 

가슴이 벅차올라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방 한칸에서부터 시작해서 '집에 대한 설레임이' 전혀 없었던-그리고 당시에는 또 중요하지 않았었던-

나의 신혼이 가끔은 아쉬웠는데  결혼 10년차에 나의 집에 대한 설레임을 다시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머리카락이라도 바닥에 떨어지면 바로 줍고, 소파에 아이들이 밥풀을 묻히면 마른 수건을 가져가 닦고 있다. 



아이들과 계속 한 방에 지내다가

이사를 계기로 밤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아직 어색한지 밤마다 엄마를 찾는다.

덕분에 나는 삼일 내내 토막잠을 자면서 아이방과 부부방을 오가고 있다.

책상과 의자, 아이들 방에 있던 원목 서랍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이 우리 부부의 침실인데 

9년전 옥탑방에서 살던 생각도 난다. 아래층에서 누가 버린 한쪽 귀퉁이가 쪼개졌지만 쓸만하다며

제주에까지 가져갔던 4단 플라스틱 서랍장도 떠오르고(넌 잘 살고 있니) 




이런 저런 일로 마음도 몸도 바쁘고 정신 없지만

집을 생각하면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대출금을 떠올리면서 열심히 해야지 라고 

마음을 다잡게 되기도 하고

그저 좋기만 하다. 




앞으로 이사를 가지 않고도 계속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안도감 

아이가 직접 고른 벽지가 발라진 방과 새로 산 가구.

아이들의 웃음, 깨끗한 화장실(나에게는 정말로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을 선택한 이유인 거실에서 하늘과 나무가 보인다는 것. 

주방 베란다에서도 단지에 잘 조성된 멋진 조경이 보이는데 

과장을 좀 하자면 제주에서 서귀포 내려갈 때 보았던 길하고도 약간 유사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거실에 나오자 새들이 푸드득  저 멀리 숲을 향해 날아 오른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사람들이 가볍게 조깅을 하고 

산 밑이라서 그런지 공기가 다르다며 남편이 이야기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불과 며칠 전과 너무도 다른 상황이라... 

이사가 준 선물,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집'에게 감사하다. 



초심자는 언제나 과장하듯이 

이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다시 내가 이 글을 읽고, 아 그랬었지 하고 다시금 어지러진 거실을 돌아보며

흐트러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고 얼룩진 소파를 마른 수건으로 조심히 닦게 되길 바란다. 




온통 체리색이었던 집을 가능하면 밝게 바꾼 수준이지만

나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남편이 거실에 앉아 풍경이 정말 좋다면서 보내준 사진. 



일하는 이모를 위해 방을 닦아주겠다는 시봉이. 너의 정성 덕에 깨끗해 졌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