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딸과함께

아이들은 자란다 10

by 와락 2017. 11. 24.

 음식을 맛보며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그 음식 자체가 그리운 게 아니라 함께 먹었던 사람과  

분위기를 그리워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운 맛은, 그리운 기억을 호출한다.

                                                                                               언어의 온도 / 이기주  





나는 외할머니가 해 주신 등뼈찜, 꿀처럼 과즙이 줄줄 흘러내리는 탐스런 복숭아(나를 주려고 아껴두었다가 몰래 하나씩 꺼내 주셨다), 찜기에 푹 익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술빵,아랫목에 말린 고구마 말랭이 등이 가끔 생각난다. 그것 뿐인가. 

시어머니가 해주신 해물찜이며 겨울에 주로 먹던 콩비지김치찌개, 기름 한 방울 없이 깨끗하게 끓인 양지 미역국. 

아빠랑 같이 가서 먹었던 아구찜, 떡갈비와 동치미, 말린 박대를 프라이팬에 구워 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맛.

당시에는 고등어 따위는 비려서 먹지도 않고 다 버렸는데, 마트에서 고등어 살 때 마다 엄마는 이 이야길 하신다. 

버리던 것을 내가 한 마리에 7천원이 넘게 주고 사왔다고. 통영(당시에는 충무)에 가서 처음 맛본 충무김밥과 

아빠가 미군 부대에서 사온 피자. 처음엔 먹지도 못하고 다 버리고 말았지만 짜고 엄청난 크기에 압도 당했던 기억도 나고.



어느날 남편에게 어머니가 해 주신 것 중 먹고 싶은게 없냐고 물어보면 1초도 안되서 단호하게  

하나도 없다고 말해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친정 어머니가 답을 주셨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니 너한테 이야기 해도 니가 하나도 못해주니까 그런게 아니겠냐.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팩트폭력인데 너무나 정답이라서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끄응.

 


애니웨이 




2주 전 아이들과 강원도로 2박 여행을 갔다. 여행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회사 숙소에서 쉬다 오는 것이었는데 

평창, 정선, 삼척, 양양, 속초 이렇게 5군데를 갔는데도 매번 기억을 잘 못해서. 여기에 홍천까지.

비발디파크와 휘닉스파크를 헷갈려 하고 3번 정도 간 도로를 왕복으로 하면 6번 이상이겠다. 4번 째 쯤 어디선가 본 것 같다며 

데자뷰인가. 이러고 있으니 남편이 혀를 차며 매번 같이 다니지만 기억을 못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답답해 한다. 


하지만, 내 미각에 의존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며 맛의 지도를 따라 

속초에서는 오징어회, 정선 시장에서 옹심이, 양양에서 오징어물회를 먹었었다고 기억해 내자

식탐만 많다며 타박했지만 나는 사람마다 기억의 회로가 조금씩 다른 것이라고 

나는 혀에 기억 분자가 많이 있다며 나의 식탐을 옹호했다. 





이런 엄마를 닮은 경선생은 맛 평가에 있어서는 (엄마와 달리) 무척이나 단호하고 엄격한데 

어제도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다시마튀각이 어린이집에서 먹었던 그 맛과는 전혀 일치 하지 않는다며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같이 만든 시봉이와 할머니의 공분을 샀다. 


페이보릿 음식 냄새 중 베스트는 젓갈 냄새인데(특히 새우젓을 애정한다)

김장은 언제 하냐고 계속 기다리다가 김장 하루 전날 지독한 냄새라고 코를 막고 도망가는 시봉이와 달리

베란다에 둔 배추옆에서 잘 맡아 보라며, 정말 좋은 냄새 아니냐고 한 동안 코를 킁킁 거렸다. 

김치를 버무릴 때도 배추 속에 김치 양념을 조심히 넣어 야무지게 바른다. 정말 손끝은 다행스럽게도 나를 닮지 않았다. 

니가 엄마보다 훨씬 낫다는 둥, 요리를 얼마나 잘 하게 될지 할머니는 무척 기대가 된다는 둥

예언적 발언을 계속 하시는 친정엄마 옆에서 요리 유망주 딸과 함께 배추를 버무리는 게 참으로 부담스럽지만 

엄마 말이 아마도 다 맞을 것이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배추를 김치통에 넣었다. 




지난 주, 경선생은 영어책 음독 500권 읽기를 달성했다. 

따로 준비한 상장과 집에서 자주 보기 힘든 과자와 시리얼까지 넣은 과자 상자를 선물 받고서는

입이 귀에까지 걸리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이후로도 매일  5권씩 꾸준히 읽는 중이다. 

수학이 제일 싫다고 숫자만 봐도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지만 하루에 수학 문제집이나 수학책 복습도 2장씩 하고 있다. 

발레에서는 거미 동작까지 도전 중인데 어제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며 집에 와서 동작을 시연해 주었고. 

친구들 관계도 1학기에 비하면 좋아졌고(단짝이 생겼으니), 여전히 점심시간에는 도서관에 가서 학습만화를 읽고 있지만-

전에 비해 우려하는 마음도 줄어들었다. 아이의 성향이 그러한 것이니. 

어쩌면 아이는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데 아이를 바라보는 나, 마음의 여유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상했던 대로  시봉이는 김장을 하기 위한 물리적 장비는 언니보다 한 단계 고퀄로 무장한 채 도전했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배추에 양념을 꾸덕꾸덕 바르다가 급기야 배추 잎이 거의 떨어져

너덜너덜 해졌는데 할머니의 만류에도 여러 차례 시도하다가 장갑만 2번 갈아 끼고는 20분 만에 포기.

왜 김장을 하는데 흥이 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시작 전부터 모든 장비는 완전하게 하고 싶어하는 그 욕구는 내 잘 알겠다.

그리고 내심 궁금해졌다. 시봉이의 장비병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 (아빠에게 바로 제지 당하겠지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지는 2달이 넘었는데 벌써 승급시간에 합격해서 노란띠가 되었다. 

하원 차량에서 내릴 때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이 기특해 집에서 시키면 잘 안하는데 

지난 번 남편의 친구분이 캐나다인 약혼자를 데리고 집에 오자 멋진 태권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돌려차기 할때 발의 위치는 겨우 무릎 정도에 올라와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다들 지금 발차기 한 것이 맞냐고 수군수군)

그에 반해 비장미 넘치는 표정과 기개는 아주 용맹스러워서 사회생활 많이 한 마흔줄의 어른들 답게 큰 소리로 환호해주었다. 

정말 승급시험에 합격한 것이 맞냐고 노란띠가 된 것이냐고 물어보니 당차게 말한다. 

사범님이 그러는데, 동작은 좀 틀려도 용감하고 씩씩하게 외치며 동작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대.



매년 생일이 연말에 가깝다 보니 자기 생일은 언제냐고 묻고 또 묻고를 반복하는 시봉이는 시크릿쥬쥬 셀카폰을 받고 싶어 

했으나 아빠의 제지에 두번째 위시리스트였던 그림 한자 사전을 선물로 받았다. 

아직 사전 쓰기를 완수 하지 못한 엄마로서 아이가 사전을 끼고 뭔가 밑줄을 긋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 한 구석이 착잡하다. 시봉이는 한자 사전, 속담 사전, 영한 성경책을 들고 쇼파에 기대어  붓으로 하염없이 줄 치는 행위를 종종 하는데 내가 사전에 밑줄을 긋고 있을 때 나를 보던 남편의 심정이 저랬을까 싶기도 하고.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


요즘에는 자기 전에 교회에서 나눠 준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요일별로 읽어주는데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긋한 목소리로 아이를 위한 축복의 기도를 해 놓고서는

소리를 지르기 쉽지 않기 때문인데 덕분에 콩코르정을 더 찾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또한 그랬었지 하며 추억하게 될 것이므로.









요하이, 꼬깔콘, 쵸코하임, 초코송이, 시리얼.

모두 경선생이 애정하는 과자들인데 신기하게도 꺼내서 먹겠다는 이야길 안한다.

설마 아끼는 것인가?



배추 잎이 다 떨어져 나갈 정도로 치대서

보다 못한 경선생이 배추를 아기 처럼 소중히 대하라고 알려주었다. 




면봉에 식초를 묻혀 비밀 편지를 쓰고 있다. 집이 빙초산 냄새로 진동했지만-

함정은 꾹꾹 눌러 써서 전구에 비추지 않아도 뭐라고 썼는지 다 알게 됨. 



매년 생일 100일전부터 카운트하는 시봉이.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보니 태권도 검은 띠 딸 수 있도록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