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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17년 12월 31일

by 와락 2018.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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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멈춰 선다. 한 번도 멈춰 선 적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쁜 사람들이 여기저기 멈춰 서 있다. 

생전 처음 멈춰 서보는 것처럼 스스로 어색해하면서도 행복하게 멈춰 선다. 나는 멈춰 섬을 멈추고 한발 물러나 

내남직없이 바쁜, 어쩌면 바쁜척이라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멈춰 섰다 움직였다 하는 걸 바라본다. 

나의 멈춰 섰던 시간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순간도 그리움이 되면 길어진다. 

                                                                                                                    박완서 / 호미 





2017년 마지막 날이라고 하지만 

집에 TV도 없고 미세먼지가 심해 교회와 마트를 제외하고는 집에 있어서인지 감흥이 없다. 

성탄을 맞아 성당에서 평소보다 좀 오랜 시간을 보내시는 친정어머니를 보며  '장모님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라는 

남편의 말이 예언처럼 실현되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새벽2시 119를 불러 대학병원에 가서 응급병동 입원까지- 

연 이틀을 그렇게 보내고 연말을 맞았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한 달간 동생네 집에 가서 쉬신 후 돌아오시기로 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창 밖의 미세먼지와 장바구니 영수증을 보며 한숨짓는 부모와 달리 

주자매들은 교회에서 받아온 선물을 갖고 노느라 바쁘다. 틈틈히 싸우는 것도 잊지 않고. 




2017년, 서른 일곱살

20대에 꿈꾸었던 아름다운 나이인데 현실과는 달랐다.

내가 롤모델로 생각한 우아한 30대 그녀들은 20대에도 눈부셨음을 잊고 있었다. 

미용실에 갈 때 마다 손상된 머릿결과 피부에 대해 아낌없는 조언을 받아 부담스러웠고

평소 잡지는 읽지 않았지만 더욱 더 멀리 하게 되었다. 

그리고 꼭 안티에이징 만이 답인가 라는 신념을 갖기로 했다.(단호)


올 한해는 경선생의 문을 열어주는 마음으로 회사를 쉬고 멈춤의 시간을 가졌다.

얼마 후에는 이 시간을 무척이라 그리워 할 것이다. 

제주에서도 그랬지만 여유의 시간이 있다고 해서 영화를 한 편 보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낮잠을 늘어지게 자거나 

바쁜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있지는 않았다. 나대로 나의 시간을 보냈다. 

한가로운 평일 오전 도서관 유아,아동 서가를 돌며 보물같은 추천도서 리스트를 꼭 쥐고 

상호대차와 예약까지 걸어놓고 대출해 와서 책장에 꽂아두면 엄마의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자매가 어느새 책장앞으로 와서 시원한 물 한잔을 들이키듯 거침없이 읽어 내려간다. 

이것은 재미있고 이건 별로야. 난 이 작가 책이 재미있더라. 아이들의 생생한 평가도 옆에서 듣고. 

같이 그림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200쪽이 넘는 책인데도 재미있다며 발그레해진 얼굴로 1시간이 넘게 책 속 세계에 빠져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아쉬워하는 모습. 엄마 정말 최고로 재미있어. 이건 재미라고 표현하기 어려워. 감동적이야. 


이동식 카트에 많게는 50여권씩, 허리를 굽혀 차 트렁크에 올렸다 내렸다 일주일에 4번 정도 하고 나면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고, 어쩌다 시봉이가 책을 도서관 바구니에 넣지 않고

본인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놓아 반납기일을 놓치게 되면 화가 머리 끝까지 나기도 하지만-

책과 사랑에 빠지는 주자매의 모습을 보노라면 도서관에 가는 나의 모든 노력들이 보상받는 기분이다. 

결국 아이들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내가 나의 시간을 이렇게 쓰겠다고 선택한 것이고 이 또한 괜찮았다. 



2017년을 회고하다 보니

경선생 입학, 미국여행, 복학, 가족상담, 부모수업, 마더와이즈 등의 키워드로 정리가 되는데 

그 어떤 것보다 연말즈음 주님을 다시 찾게 된 것이 가장 큰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 또한 그 분이 예비하신 일이고.




경선생의 2017년은 다채로웠다. 

학교에 입학했고 버퍼링이 걸리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2학기 되서부터는 단짝 처럼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생겼다. 

가족 외에도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경선생에게 큰 힘이 된 듯. 

클레이와 종이접기, 3D프린팅, 음악줄넘기, 인라인, 발레, 바이올린, 영어 등 

방과후수업을 비롯해서 여러 사교육을 접한 한 해였는데 내년에는 인라인과 영어는 가지치기로 했다. 

동생과 집에서 영어 DVD를 보고 난 이후로는 대사를 따라하기도 하고 쉬운 그림책은 곧잘 혼자 읽는다. 

숫자만 봐도 질색해서 수학이 가장 싫은 과목이다. 책이나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려주신 지식은

아낌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데 얼마 전에는 어린이 삼국지를 읽고 제갈공명이 만두를 만들었다면서 

만두의 유래에 대해서 알려주기도 했다. 

발레는 여전히 애정하며 가끔 저녁에 발레 스트레칭을 가족들에게 알려주는데 동작 하나 하나 반듯해서 

남편이 사교육 시킨 보람이 있다며 뿌듯해했다. 




시봉은 언제나 즐거웠지만 17년도에는 태권도를 배워서 더욱 더 즐거운 한해였다. 

18년도에는 학교에 간다고 하니 매일 아침 눈 뜰때 마다 대체 언제 가는거냐고 묻는다. 

일정이 생기면 최소 60일 전부터는 카운트에 들어가는데 매일 물어봐서 귀찮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설레임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주시봉에게 배워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혹은 민망함 등은 본인의 것이 아니고(다른 이의 것)

그저 기쁨과 설레임, 태권도에서 배운 할수 있다 정신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대하는 시봉이는 벌써부터 서랍에 둔 책가방을 꺼내 들고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남편은 매일 4시간 출퇴근을 하며 17년을 버티었다. 

원래 계획은 6개월이었는데 기약없이 연장되었다. 

그 때문인지 연말즈음에는 3주간 감기로 고생하며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의 검소한 위트마저 말라버렸다)

그가 무언가를 산다고 할 때면 나는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데 얼마 전에는 탈모 예방 로션이 있어 당혹스러웠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머리 숱이 부족한 그의 모습은 한 번도 예상하지 않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냉동피자를 남편이 사와서 네 식구가 둘러 앉아 맛있게 먹으며

올해의 감사한 일과 내년도 목표를 나누었다. 


경선생은 발레를 보다 충실히 

시봉은 태권도 검은띠 도전(지금 초록띠)

남편은 자격증 공부와 큐티, 운동 

나는 논문졸업과 자격증 대비, 큐티 




9월이었나 햇살 좋은 날, 점심으로 집에서 싸간 고구마와 커피를 먹으며 한가로이 도서관 놀이터에 앉아 있던 시간.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를 보면서 잠시 나의 육아를 되돌아봤었다. 

후회말고 지금 충실하자. 라며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17년도를 돌아보면 한발 물러나 멈춰 섰던 그 시간을 그리움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