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알람에 벌떡 일어나 흑임자 죽을 만들고
복숭아, 사과, 참외, 방울토마토를 접시에 가지런히 담는다.
후루룩 죽을 마시고 있는 듯한 남편에게 어제의 일과를 짧게 브리핑 하고 못다한 이야기를 잠시 나눈다.
부부간의 대화는 길어야 하루에 10분 정도랄까.
남편이 양치하러 간 사이 큐티를 하고 경선생을 깨우러 간다.
두 팔을 나란히 위로 하고 한 침대에 누워 쌕쌕거리며 자는 주자매.
아이에게 일어날 시간이야 라고 속삭이고 나와 남편을 배웅한다.
우유와 신문을 가져와 식탁에 올려 놓고 남은 흑임자죽을 그릇에 담지도 않고 국자로 떠 마신다.
왜 남편이 천천히 음미하지 않고 후루룩 마셨는지 그 이유를 잘 알겠다.
참 건강한 맛이다.
5월에는 논문 프로포절 준비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니 매일 매일 나의 무능앞에 쩔쩔매며 버텼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새벽 1시쯤에는 그냥 다 포기하고 학위인증 시험을 치를까.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도 했지만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사히 발표는 끝냈다.
아직 거쳐야 할 단계가 많이 남았지만 프로포절까지 끝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다.
한 고비는 넘겼다.
6월 초 발표가 끝나고 그 다음 주 미국에서 사시는 시누이 가족이 2주간 우리 집에서 지내시다 가셨다.
집 정리나 병원 진료 등 여러 일들로 바쁘게 보내셨기 때문에 집에 계신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밥상을 차린 횟수도 많지 않은데 지난 주 가족들이 떠나자 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바로 앓아 누웠다.
감기 몸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심지어 월요일에는 동네 병원에서 수액까지 맞고 돌아왔는데
기침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수액을 맞으며 병원 간이 침대에 누워있으니 남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막상 형님네 왔다고 해서 크게 한 일도 없는 듯 한데 왜 이리 아프지? 라고 내가 말하자
담담히 '그러게' 라고 재빨리 수긍했다.
평소에는 무응답 및 'So What'의 태도를 취하던 남편은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공감'을 하는데
다음 날 저녁 '적절한 때에 공감을 해달라'라고 요구하니
그는 맥주를 들이키며 '공감을 해 달라고 해서 한거다' 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초등학교 때 글짓기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은 이력도 있고
학창시절 국어시험은 거의 만점을 맞았다고 하니
문장에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숨은 의미 찾기 정도는 잘 할 것이라 믿는다.
커피를 마시어도
좀처럼 느슨해진 나사가 죄어지는 느낌이 없다.
냉장고를 열어 주자매가 아껴둔 막대사탕을 입에 넣었다.
달큰한 향이 입안에 퍼지니 기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 주 시험을 마지막으로 종강했다.
모든 수업이 알차고 좋았지만 '집단상담'수업이 가장 의미가 있었다.
"책임감에 압도 되었던 소녀에게 정말 수고했다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고
이제 좀 내 마음을 우선 살피는, 여유 있고 배짱있는 엄마, 아줌마, 앨리스님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라는 교수님의 마지막 피드백이 마음을 울린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그대는 힘들 일이 많았죠.
슬픈 얘기들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
이제서야 미련 없이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 듯 싶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후회 없이 꿈을 꾸고 사랑했노라 말할 수 있도록 사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