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읽고 책장에 꽂아 두었다가
최근 트레일런이나 무박산행, 혹은 백패킹까지 하는 산사람들 영상을 보다 다시 꺼내 읽었다.
글을 읽는 내내 킥킥거렸다.
어떻게 이런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가.
천재적인 유머 작가라는 호칭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빌 브라이슨. 그리고 그의 친구 카츠.
추천사 중에 "빌 브라이슨은 헤어드라이어에 달라붙은 보풀이나 해열제에 대해서 에세이를 쓰면서도 우릴 웃길 수 있는 사람이다"
- 시카고 선 타임스 글이 있었는데 이 추천사를 쓴 분이 누구신가. 꺅꺅 거리며 읽었다.
빌 브라이슨은 20년간 영국에 살다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뉴잉글랜드에 정착한다.
집에서 나와 조지아 주까지 2천 킬로미터 넘는 길을 걸으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마운트 캐더린 산을 밟아볼 수 있다는 충동이 솟아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결심하게 된다. 더불어 그 명분과 구실을 찾는 과정을 약 2페이지에 걸쳐 소개해 주는데 낯설지가 않고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왜일까)
서둘러 결심을 주변에 알리자 모든 사람들은 잘 아는 지인의 얘기라며 무시무시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종주에 나섰다가 머리에 살쾡이가 달라붙어 돌아온 사람, 곰이 텐트 안으로 쳐들어온 이야기는 도합 4번, 나무가 쓰러져 텐트를 덮치거나 폭풍우 속에 벼락을 맞고 정신을 잃었지만 그을린 자국 외에는 괜찮다는 등의 이야기. 그러나 작가는 굴하지 않고 비싼 거금을 주며 등산용품을 구매한다. 애팔래치아 종주는 말 그대로 필요한 짐을 모두 짊어지고 걸어야 하므로. 다행히 유럽여행에도 등장했던 고향 친구 '카츠'가 같이 동행하겠다고 하며 애팔래치아 대장정이 시작된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 생태계 파괴를 자처하는 산림청의 과학적 조림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곁들어 짐이 무겁다며 커피 필터까지 다 내던져버린 카츠 덕분에 휴지로 커피를 내려 하얀 티슈가 둥둥 떠 있는 따듯한 커피와 남아있는 식량 건포도를 먹고 다시 힘차게 산행을 시작하는 빌의 행보를 따라 읽으며 나도 언젠간 애팔래치아 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리산 종주라도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몇 번 유튜브로 관련 영상을 검색하니, 정말 멋지게 비박도 하고 유려한 영상을 남기는 유튜버들도 많았다.
책 중간에는 트레일을 20분 걸을 때 마다 미국인이 평균 일주일에 걷는 것보다 더 걷는 셈이라며 보행을 할 수 없는 도로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여러 질병, 환경에 오염되어 점차 사라져 가는 숲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그럼에도 최소한 아직 숲이고, 멋진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는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사정으로 (더불어 여름 한 철은 피하고) 잠시 쉬다 다시 만나서 종주를 하기로 결정한다. 중간에 빌 브라이슨은 집에서 싼 샌드위치를 가지고 근처 산까지 차를 가지고 가서 당일치기로 등산하기도 하는데 몸의 기억이 있어 당일치기 산행의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8월 말이 되어 다시 카츠가 합류하여 둘은 마운트 캐더린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하지만 카츠가 중간에 맥주를 마신다는 사실, 애팔래치아 종주 중에 음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빌은 화를 내며 둘은 크게 다툰다. 이후 화해를 하지만 늙고 지쳐 보이는 카츠가 눈에 들어온 빌,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회의가 들었고 본인들의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리고 물을 뜨러 간 카츠랑 길이 엇갈려 찾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며 애태운다. 걱정하며 어지러운 밤을 보낸 후 새벽에 다시 트레일로 돌아가 아침이 돼서야 겨우 여기저기 긁힌 흔적과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카츠를 발견한다.
둘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트레일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더 이상 산사람인 것처럼 굴지 않기로 한다. 마운트 캐러딘은 못 봤지만 그들은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카츠의 말처럼 눈 속에서도, 뜨거운 태양에서도, 남부에서도, 북부에서도 걸었다.
빌 브라이슨은 캐더딘까지 가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고 한다. 그럼에도 텐트 치는 것도 별빛 아래에서 자는 것도 배웠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날렵하고 튼튼해진 몸에 대해서도 뿌듯해한다. 그는 친구를 얻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애팔래치아를 내 생전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검색을 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 외에도 돌로미티, 샤모니 등 이탈리아, 프랑스 알프스 산맥의 트레일 코스도 다니고 있었는데 달리기 외에 또 다른 세상을 구경한 느낌이었다. 최근 보고 있는 운동 유튜버가 '안내산악회'에서 무박출발하는 산행코스를 다니면서 새벽에 등반을 시작해 5시 일출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며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빌 브라이슨의 책은 그보다 더 나아가 '지리산 종주'까지 꿈꾸게 만든다.
언젠가는 이런 네 글자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번 가을, 혹은 내년 초. 풀마라톤을 마치고 겨울 산행을 해 볼까라든지.
50살 전에 마음껏 도전해 보고
그 이후에는 해외의 트레일코스도 걷기든 달리기든 해 보고 싶다.
아름답고 찬란한 자연의 풍광 앞에 서 있으면
잠시 멍해지면서 겸손해 지니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안전하게 산을 내려오기 위한 장비부터 마련해야 할 것 같다.
자본주의 러너는 못되었으나, 안전한 산행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장비는 정말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완벽한 명분이랄까.
밑줄 그은 구절
차에서 내리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엄습, 자동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차갑고 무심한 바람이 사방에서 화살처럼 몸에 꽂혔다. 옷소매가 저절로 팔랑거렸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p57
그러면 어느새, 연령층도 다르고 직업이나 성도 다르지만 같은 날씨, 같은 불편함, 같은 경치, 메인 주까지 종주하려는 자기중심적 충동을 공유하게 돼서 서로를 동정하는 느슨한 연대감이 생기고 친근한 한 무리의 일원이 된다. p84
가만히 누워서 기묘하게도 명료하고 분명한 밤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바람과 나뭇잎이 안달하면서 내쉬는 한숨과 나뭇가지의 지루한 신음, 끊임없는 중엉거림과 살랑거림에 마치 전기가 나간 회복기의 환자 병동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는 일어나 추위에 다시 진저리를 치고 손을 비비면서 말없이 우리의 사소한 일상, 배낭을 싸서 메고 모든 게 뒤엉킨 거대한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났다. p85
"11달러나 주고 샀어."
지도를 흔들어대며 카츠에게 말하는 내 음성에 분노가 아직 남아 있었다. 보란 듯이 꾸깃꾸깃 접어서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신경질적으로 지도를 잡아채듯 꺼내서는 달리 뭐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p122
하지만 절경이었다. 모든 나무들이 두툼한 흰색 망토를 걸쳤고, 그루터기와 자갈은 멋진 눈 모자를 쓰고 있었다. 폭설이 내린 날 깊은 산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완벽하고도 광대한 적요. 눈덩이들이 여기저기 나뭇가지에서 무너져 내렸다. p127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가르쳐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우리 둘 다 삶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환희를 정말 행복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p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