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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가을 하늘, 운현궁, 루프탑에서 맥주 한 잔

by 와락 2024.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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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 만남이 뒤로 밀려 9월 마지막 주로 잡혔다. 트렌드에 민감하진 못해도 따라가고는 싶어서 서울의 핫한 거리는 어디냐 물으니 ‘순라길’에서 만나자고 한다. 운현궁 근처. 한적하게 궁 안을 거닐 생각을 하니 설렌다.

당일 아침에는 동대문 탄천을 5km 정도 달렸다. 경선생 중간고사 끝난 기념으로 노보텔에 숙박하러 와서 하루 자고 아침에 뛰고 호텔 안에 피트니스 센터까지 이용하니 하루 일정 시작을 알차게 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뿐이랴. 1시 운현궁에서 만나기로 해서 노보텔에서부터 50분가량 슬슬 서울 시내를 걸었다. 햇빛이 좀 뜨겁긴 했지만 청량한 가을 하늘, 깨끗한 공기. 예전과 다른 종로 3가가 낯설었지만 옛 추억도 떠올리면서. 남편과 예물 맞추러 왔던 종로 귀금속 거리도 많이 축소되었다. 시어머니랑 같이 왔던 곳은 어딘지 짐작도 못하겠다.


궁안에서 한숨 돌리자니 오양이 시간보다 약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블랙 롱 원피스에 포인트로 목걸이를 하고 쨍한 그린 컬러 카디건을 살짝 걸쳤다. 양쪽 귀에는 동그란 진주모양의 귀걸이로 꾸안꾸를 연출했으며 햇빛을 대비해 선글라스까지 장착하고 온 내 친구. 멀리서부터 부티가 흐른다. 만나자마자 덥다며 연신 손부채를 한다. 입이 조그마한데 귀여운 입술이 빨갛게 반짝거린다.  만나자마자 깔깔 거리며 궁을 한 바퀴 같이 돌았다. 외모를 놀리는 것으로 유치한 대화가 시작된다. 대만 부자 같다고, 땅 보러 왔냐고 물으니 우리 엄마가 귀엽다고 이쁘다고 했단 말이얏 이라면 앙탈을 부린다. 참고로, 우리의 나이는 40대 중후반이다.

한 바퀴 궁을 돌고 뒷모습을 찍은 후 (정면 사진이 점차 보기 싫어져서 뒷모습 촬영을 부탁한다) 순라길로 향했다. 근처 카페에서 정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20년 넘게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데 정지가 정시에 나타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다. 거리는 생각보다 짧았는데 예전 삼청동 같이 작은 가게들이 소품샵을 비롯해서 연달아 있었다. 거리 중간에 전현무 방송으로 더욱 유명해졌다는 타코 가게가 있었는데 줄지어 기다리지는 말자고 다짐하고 주변을 유유히 두어차례 돌다 작은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이건 내가 살게. 요즘 선행일지를 쓰거든. 묻지도 않은 걸 말하며 커피 한잔에 생색을 냈다.  

다행히 자리가 있어 음료를 받아 마시며 다음 장소를 물색하고 네이버로 예약도 했다.  종각 근처 회사를 다니는 오양이라 역시나 좋은 곳을 많이 알고 있었다. 1.5km 정도 되려나. 오양이 오래간만에 걷는다고 한다. 높이 솟은 가을 태양을 오양은 선글라스로 나는 손으로 피해 가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정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청계천 다리 밑 그늘에 잠시 앉아 쉬기도 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마치 결혼식 하객처럼 화사한 크림색 블라우스를 입고 온 정지가 앉아 있었다.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는 진주가방이 옆에 다소곳하게 놓여 있었다. 경박한 우리 친구 둘은 ’다이소에서 샀냐는 둥, 동묘에서 골랐냐는 둥‘ 놀리자 정지는 정색하며 일본 면세에서 50만 원 가까이 구매한 제품이라고 한다.  몰라봐 미안하다 친구여. 메뉴는 늘 그렇듯 오양과 정지가 알아서 주문한다. 샴페인 같은 화이트 와인도 한 잔 주문하고. 찰칵찰칵 전망 좋은 집 잡지에 나올 법한 어색한 포즈로 사진도 찍는다. 한참 서로의 안부를 돌려가며 체크한다. 지난 번 서재페때도 분명 만나서 나눈 이야기인데 음악 소리에 묻혔는지 서로 알고 있는 정보가 조금씩 다르다. 다들 못 들었다고 난리. 말한 당사자는 지난 만남 때 이야기 했다고 단호하다. 뭐 어떠랴. 우리는 다시 고장난 라디오 처럼 또 이야길 한다. 다시 들으면 또 어떠리. 자꾸 잊기 때문에 괜찮다. 호르몬의 작용 때문인 건지 노화 때문인지 우리는 금새 잊고 새로운 정보처럼 받아들이기도 잘 한다. 비슷한 포인트에서 같이 웃고 환호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만남을 지속하는지도 모르겠다. 

배도 든든히 채우고 다음 모임 장소를 향해 걸었다. 그래봐야 횡단보도를 건너는 수준이다. 루프탑에서 석양을 보며 한 잔 마시자는 제안인데 마다할리 없다. 이번에는 마지막 루프탑이 어디었는지 서로 의견이 분분하다. 5년 전 이태원인지, 아님 그 이후에 다른 장소인지. 오양은 최근 트라비포켓이라는 앱에서 다년간의 여행 기록을 기재해 두었는데 앞으로는 서로의 못믿을 기억이 아닌 오양의 기록에 의지하기로 했다. 따라하기 좋아하는 나는 금새 오양의 추천앱인 트라비포켓 앱을 다운로드 받아 두었다. 

해가 뉘엇뉘엇 지는 듯 하니 외국인들이 하나 둘 씩 모인다. 서울 외국인 모임이라도 되려나. 아쉽게도 귀가 닫혀 있어 그들의 이야기가 전혀 들리지 않아 우리 대화도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전 카페에서는 옆 테이블의 남자분 이야기가 자꾸 들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기도 하고, 아주 오래전에 오양이 사내의 불륜 커플 이야길 할 때는 옆 테이블조차 우리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 같아 난감하기도 했다. 

해는 점점 기울고 배도 불러간다. 그녀들은 마지막은 떡볶이를 먹어야 되지 않겠냐고 한다. 예상했던 바이다. 그러나 혈당파티는 충분히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자리로 끝내자 제안한다. 우리는 1시에 만나서 9시가 넘는 시간까지 8시간 가량 당을 섭취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최화정 선생님 말씀처럼 제대로 된 '밥'은 먹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피맥'을 아는 현대인 답게 메뉴판에 떡볶이가 부재함을 아쉬워하며 피자를 주문했다.  맥주 무한정 주문 시간이 끝날 때쯤 우리 친구들은 홈쇼핑 마감시간에 쫓겨 결제버튼을 누르는 사람처럼 초조해 하면서 한 잔씩 더 주문했다. 나는 해창 막걸리를 주문했는데 너무 달아서 먹다 포기했다. 주문한 피자와 맥주를 들이키며 50대가 되면 30주년 우정파티의 여행 장소를 말한다. 로마. 파리. 이탈리아 남부. 동남아. 그 날이 오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너무 빨리 올까 두렵다. 정확하게는 스물이 안된 19세에 만난 친구들인데 이들과 50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서태지의 컴백홈  "우린 아직 젊기에, 새파란 미래가 있기에"를 같이 불렀던 우리들이다. 거칠은 인생속에 열일 하고 훤한 앞길을 기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오니 이 나이가 되었다. 

차 있는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던 오양은 가장 먼저 마이카 오너가 되었고 그 어렵다는 서울에 아파트도 마련했다. 세계여행을 간다면서 야심차게 결혼한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벌써 삐약거리던 아이들이 중학생이다. 자유부인을 꿈꾸던 정지는 선녀와 나뭇꾼 동화처럼 두 아이를 낳고 선녀가 되기를 반쯤은 포기한 듯 하다. 

다음 약속장소는 올 해가 가기 전, 강남의 한 호텔에서 1박을 보내기로 했다. 그 밤이 기대된다. 

순라길, 오양 사진 색감이 좋다
장소는 노우즈 종로
첫 번째 잔은 무조건 사진을 남기며 '짠'

 

주전부리와 맥주, 막걸리. 다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다.

 

나야, 가을 하늘
점차 해가 지고
핑크빛으로 물드는 구름,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요
그렇습니다 야경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멋진 야경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 탈락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