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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feat.근력운동)

2024년 제주 감귤마라톤 풀42.195km 완주

by 와락 202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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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시간 대부분은 숨차고 고되다. 그러다 비로소 결승선을 밟고 숨을 고르는 동안 아주 잠시 아득하다. 땀이 마르고 호흡이 돌아오면서 정지된 순간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드디어 마쳤다, 해냈다’는 해방감과 희열이 느껴진다. 나에 대한 믿음과 만족스러움에 벅차고 동료 러너들과의 교감까지 더해져 기쁨이 차오른다. 이후로는 물밀듯이 피로감이 몰려온다.
<마음의 힘이 필요할 때 나는 달린다>, 김세희

 


22년 손기정 마라톤 대회 10km 참여를 시작으로 두 어번의 하프 마라톤 대회를 거쳐 드디어 42.195km를 완주했다.

대회는 일요일 오전이라 전일 내려가기로 했다. 결혼기념일을 제외하고 아이들만 두고 집을 비우는 일은 없는데 급하게 친정어머니께 부탁했다. 어머니는 마흔 중반의 내가 무리하다 도가니라도 나가면 어쩌나 늘 걱정하시지만 그럼에도 신나게 뛰고 오라며 응원을 해 주신다.

대회 전에 몸풀기는 고사하고 매일 야근모드라서 몸이 무거웠다. 점심때마다 연속 3일 카레우동을 먹으며 스스로를 카보로딩 중이라 속이기도 하고(비겁하군요).

내려가는 토요일 오전에는 특히나 몸이 더 다운되고 울적해져서 대체 왜 이런가 싶을 정도였다. 남편이 오전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채근하는 통에 겨우 짐을 꾸려 공항버스 탑승했는데,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1시간 30분가량 버스에서 멀미를 했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내려가는 중에도 신나기는커녕 우울했는데 도착하고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택시를 타고나서 제주의 바람을 맞으니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짐을 푼 후에 식사 장소를 알아보러 나갔다. 시장 통닭이 우리를 유혹했지만 대회 전날이니 튀긴 음식보다는 속 편한 탄수화물이 좋겠다 싶어 탐색하다 발견한 ‘회춘’이라는 맛집. 창가 자리에 앉은 외국인 부부가 즐거운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길래 들어갔는데 식사는 훌륭했다. 아마 제주에 놀러 온 거라면 흑돼지나 회를 먹느라 이곳은 스쳐 갔을 듯 하지만 속 편한 한식이 정갈하게 나와 좋았다.

장소 : 회춘

회춘 입구
9천반상에 고등어 구이, 국까지 나와요. 인당 15000원 정식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간단한 요깃거리를 근처 마트에서 구매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감귤마라톤이니까요. 이왕이면 감귤색으로


새벽 6시 30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감귤마라톤이라 작년에 스타일런에서 받은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뛰기로 했다. 
 러닝벨트에는 에너지젤도 4개나 두둑히 챙겼다.

동일한 일동제약에서 나온 제품인데 하이뮨이 가격은 좀 더 비싸다. 맛은 하이브리드 에너지젤 청포도가 더 좋다.

 
 
숙소 밖에 있는 야자수가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다시 깨닫는다. 아 맞다. 여기 제주지. 
대회 출발 지점인 조천운동장까지는 2km 남짓이라서 걸어가기로 했다. 
아침이 되니 여기 저기서 러너들이 짝을 지어 나오기 시작한다. 모르는 분들이지만 달리기를 같이 한다는 사실만으로 반갑다.
대회장으로 갈 수록 함성 소리도 커지고 텐션이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놀랍기도 하고. 
트랙 근처 부스에는 뜨끈한 국물에 담긴 오뎅과 신선한 제주 감귤도 주고 인생네컷도 찍어 줬는데 우리는 줄만 서다가 대회 시간이 다가와서 아쉽게도 트랙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두근두근 거리는 대회 시작 전, 텐션이 올라온다

 
 

코스는 조천운동장에서 동복리 지나서 김녕해안도로 달리다 반환
해안도로로 달리기 시작, 신이 난다

 
드디어 출발, 다른 대회에서는 하프/풀 마라톤과 10km 주자들의 출발 시간이 달랐는데 여기는 시작을 같이 했다. 그러다 보니 빠르게 달리고 싶은 10km 주자들이 와르르 달려와서 5km 반환점까지는 혼잡했다. 
 

제주의 급수대에서는 귤도 준다

 
 
많은 대회에 참석해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순 없어도 급수대에서 귤을 주는 곳은 제주 대회만의 특색이 아닐까. 
 
 

10km 지점, 하프 반환점

 
빠르게 달리는 10km 주자들을 앞서 보내고 좀 더 여유로워졌지만 여전히 힘이 넘치는 하프 주자들도 많았다. 이전 대회까지만 해도 하프 반환점에서 돌아 피니시라인을 향해 달렸는데 처음으로 이 지점을 통과해서 앞으로 직진하며 달렸다. 대회 후 기록을 보니 풀마라톤 참여자는 707명이었다. 
 

김녕해안도로를 향해 달린다. 14km 지점. 아무도 없다.

 
시작 전에 화장실에 한 번 다녀왔어야 하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화장실이 가고 싶다. 다행히 해안도로에 있는 간이 화장실을 이용하고 다시 돌아와 달리기 시작했다. 앞에 가는 사람들이 없다. 나는 몇 번째로 뛰고 있는 것인지. 호젓한 해안도로를 달리는 기분도 좋지만이렇게 늦게 달려도 되는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바람은 심하게 불지 않아서 이 정도 바람이야 우후훗 하며 달렸다.  

내 남편은 어디로

 
커플로 보이는 러너들이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해안도로 옆의 그네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대회를 즐기는 모습이 멋져보였다. 기록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잠깐 쉼표 한 번씩 찍으며 달리는 것도 추억이지. 그러고보니 우리 남편은 어디쯤 달리고 있는 것일까. 

18km 지점일까. 저 멀리 점처럼 찍힌 남편

 


인생이 마라톤에 비유되는 이유를 비로소 조금 알 것 같았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길처럼 보일 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이유로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속도에 맞게 그저 나아가는 것일 뿐이었다. - <마라닉 페이스>, 이재진

 


 
화이팅 넘치는 시작점을 지나 파도가 넘실대는 해안도로를 거쳐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지루한 도로를 달린다. 햇볕은 뜨겁고 급수대가 나오기 전까지는 근처를 휙휙 지나가는 차량을 제외하고는 나 혼자다. 가끔 나를 앞질러 가는 주자의 뒷모습을 보기도 하지만 같이 따라 뛰어갈 수는 없다. 저마다의 방식과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문장들을 읽을 때 마다 너무 구태의연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마흔 중반에서 진짜 뜨거운 도로 한 복판에서 혼자 달리다 보니 정말 왜 그리 표현했는지 알겠다.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고 오롯히 내 발로 뛰어가야 한다. 화려한 출발선을 지나고 멋진 풍경을 보더라도 언젠가는 이 지루한 길을 묵묵히 지나가야만 한다. 나보다 먼저 가는 사람이 부럽긴 하지만 이기고 싶다면 속도를 내야 하고, 무리하게 속도 내다가는 탈이 난다. 완주가 목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면 된다. 여기서 남과의 비교는 정말 쓸데 없다.

28km 지점에는 대구에서 오신 여자분과 나란히 뛰다가 그녀를 지나쳐 남편까지 따라 잡았다. 나도 내 체력에 놀랐다. 나의 튼튼한 하반신을 미용적인 관점에서만 평가하면서 그 동안 괄시했던 것은 아닌가.

바람이 어찌 불던지요.


30km가 넘어서부터는 살짝 두렵기도 했다. 연습할 때 32km가 최대였으므로 남아 있는 에너지젤을 하나 먹고 나오는 급수대 마다 바나나랑 초코파이를 계속 먹었다. (이 때문인지 대회 끝나고도 입에서 계속 단내가 나는 듯.. 한 동안 초코렛을 비롯한 간식은 못 먹을 듯)

김녕 해안도로로 돌아가는 데 맞바람이 너무 불어서 기껏 초콜렛으로 올린 체력이 방전되는 것 같았다. 바람을 치고 나갈 수 없다 보니 속도는 계속 떨어지고 심지어 눈에 모래까지 들어가서 왼쪽 눈이 대회 끝나고도 한 동안 이물감에 불편했다.

대부분의 마라토너들이 37km 지점부터 힘들다고 해서 아껴둔 에너지젤을 하나 더 먹었다. 그리고 함덕 해변 근처에서 내 앞에 있던 검정색 티셔츠의 남자 2분과 연두색 티셔츠의 할아버지를 제쳤다. (할아버지는 41km 지점에서 다시 나를 제치고 앞서가셨다!)

생각보다 달릴 만 했다.
다리가 좀 후들거리긴 했지만 도저히 못하겠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에 남편은 38km 지점에서 쓰러질 뻔 했다고 한다. 실제 달리고 난 후 남편은 몰라보게 핼쑥해지기도 했다.


드디어 피니시라인
5시간이 넘다 보니 아무래도 경기장 근처에 사람이 드물었다. 심지어 대회 조형물도 다 철거 중이라 후진하는 이동 차량이랑 부딪힐 뻔도 했다. 사진도 찍고 싶었는데 아르바이트생 시간도 끝났는지 내 앞 라인에서 캐릭터 온 입으신 분들이 어디론가 황급이 떠나셨다. 아쉽지만 그 분들도 퇴근을 하셔야 되니깐요.

남편은 중간에 힘들었는지 나보다 늦게 피니시라인을 밟았다. 힘껏 환호하고 영상도 찍어줬다. 이렇게 완벽하게 지쳐보이는 남편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늘은 푸르고
힘이 없는 상태로 찍었더니 구도가 엉망

 

 

잘 달렸다.

제주의 바람을 가르며 처음 시도한 풀마라톤

고비라 불리는 38km 지점에서도 튼튼한 나의 하체는 잘 버텨줬다.

 

 

 

40대 순위 26등이네요. 우아 잘했습니다.

 

 

 

나는 대신 지구력이 좋고 힘든 것을 참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스스로 관찰하고 격려하는 힘이 있다. 달릴 때 내가 어떤 자세로 뛰고 어떤 생각을 하고 느낌이 어떤지 보고 있다. 또한 이렇게 나를 관찰하고 있는 의식을 지속해서 보고 있다. 그러면 힘든 고비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게 된다.
<마음의 힘이 필요할 때 나는 달린다>, 김세희 

 

 

 

김세희 저자처럼 나는 생각보다 지구력이 좋고 힘든 것을 잘 참아내는 힘이 있었다. 

달리다 보면 정신이 멍해지면서 달리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 힘들어 하는구나. 그래도 달리고 있구나. 애쓰는구나. 잘하고 있어. 1km만 더 가보자.

사실 걸어가도 아무도 몰라.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 그렇지만 달릴거야. 대단하네.

 

 

남편과 나는 각기 메달을 목에 걸고, 대회에서 준 감귤을 한 박스씩 받고 대회장을 빠져 나왔다. 

그제사 긴장이 풀리는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숙소까지 돌아오는 2km가 아침과 다르게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서로를 대단하다 치켜 세운다. 그리고 다음 대회에는 5시간 내에 들어오자고 다짐해 본다. 

 

 

 

지난 가을 호기롭게 오사카 마라톤 대회도 신청해 두었다. 

겨울 내내 즐겁게 달리기 연습을 하고 2월 대회에 참가할 생각을 하니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