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이들은 구식 리본 댄스와 같아서 굽이굽이 나아가며 내 인생을 스쳐가고,
나 역시 굽이굽이 나아가며 그들 인생을 스쳐간다. 몇몇은 기억하고, 몇몇은 잊는다.
둘째로, '선택된' 친구가 있다. 수는 많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진정한 관심 때문에 함께하고,
운명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평생을 친구로 지낸다. 나는 그런 친구가 일고여덟 명쯤 있는데 대부분이 남자다.
여자 친구들은 대개 환경적으로 사귀게 될 뿐이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중-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을 읽으며 한 두가지 부러웠던 것이 아니었으나
서로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함께 하는 친구가 일고 여덟명쯤 있고 그 또한 남자라는 사실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아 여사님이여.
지난 주에도 송별회에 다녀왔다.
굽이굽이 나아가며 만난 인연이기는 하지만 4개월간 강렬하게 일해서
언젠가 다시 술 한잔이 아니라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던 분.
잘 되면 언제라도 끌어주겠다며 빈 말인 줄 알지만 믿고 싶었던.
오글거리는 멘트와 한때 연예인을 꿈꾸었던 사람답게 허세스러운 동작들이 느끼하다 생각했지만 의외로 소년 같이 순수하고.
팀원을 위해 숨지 않고 조직장에 맞서 우산(여러 차례 폭풍에 날아가 버렸었다)이 되어 주려 했던 그 분을
함께 일했던 대다수의 동료들은 신뢰하고 애정했다.
참 좋은 사람. 일을 대하는 태도가 자칫 비장하고 과장되기도 해서 저럴 것 까지야- 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으나
항상 그는 진심이었다. 제휴사와 끊임없이 밀고 당기는 업무를 오랫동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계산적이지 않은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받기도.
짧지만 굵게
새벽 2시, 새벽 5시, 오전 7시, 점심, 오후 1시, 밤 11시
쉬지 않고 주고 받았던 메일들을 열어보고 웃음이 나왔다.
당시에는 정말이지 심각했던 그 모든 일들이 지나고 나니 아 그랬었지.
둘째 낳고 팀을 옮긴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누군가의 못다한 일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어찌나 억울하던지... 분통이 터져 그에게 울분을 토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
서로 누가 더 억울한가 대결이라도 펼치듯 맥주를 들이켰던 기억이 새록새록.
제주에 내려가기 전.
동료로서는 정말 아쉽지만(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물으며)
나의 제주 생활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 팀에 대한 죄책감을 말끔히 씻겨주었던 그 분이
퇴사 소식을 전화로 직접 전해 주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언제 들어도 버터를 바른 듯 매끄러운 목소리
본인이 원하는 삶의 궤적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환송회 자리에서도 참석한 사람들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그의 퇴사를 축하하는 것을 보고
나의 조직에서의 마무리는 어떠할지 감히 상상해 보았다.
이제는 제주의 공무원이 된 그가
몇 년 전 박웅현 CD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예의 그 기름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고 문어체로 말했던 기억이 난다.
너의 점을 찍도록 해.
한 점 한 점 찍다 보면 별이 되어 있을 거야.
당시에는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지금 소름 돋은거 안보이냐 오글거린다고 꺅꺅 거렸는데
가만히 곱씹어 보게 된다.
그러게요. 저도 별을 만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