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문득 과거를 돌이켜보다가 '아, 나라는 사람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 때가 있습니다. 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나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일부'입니다. 정말로 그렇구나 싶습니다. 구마모토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만남, 대학 시절의 만남, 유학 시절의 만남, 비상근 강사 시절의 만남, 그리고 대학 교원이 된 이후의 만남. 그러한 만남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저는 없을 터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되지도 않았을 터입니다.
동시에 제가 지금 하는 일에 다다르게 된 것은 엄청난 우여곡절을 겪으며 수많은 길을 돌아서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신 것처럼 저는 줄곧 '스피드 출세'나 '조숙한 천재'처럼 세상 사람들이 동경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느린 길 위에서 저는 초조해하기도 했고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쓸모없음의 효용이라고나 할까요.
강상중 /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p97
이동한 부서에서 내일까지만 근무하고 다음 주 부터는 새로운 곳으로 출근을 한다.
휴직 기간을 포함해서 15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떠난다니... 스스로도 믿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분들의 퇴사를 지켜보며 환송회도 준비했고, 오늘 저녁 조차도 이전 조직장의 환송회에 참여한다.
오후에는 인사담당자와 면담을 했다.
오래 다녔던 조직을 떠나는 소회를 묻는데 담담했다.
'졸업 하는 기분입니다. 좋은 분들 덕에 여러 업무를 경험해 보며, 제주도에서도 근무할 수도 있었구요.'
진부하지만 진심이다.
2005년 6월 첫 출근, 장마 끝무렵이라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목에 사원증을 걸고 나를 뽑아준 분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목걸이에 닿아 달그락 거리던 사원증의 경쾌한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식사 시간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리둥절 했을 뿐.
활기가 느껴지고 사무실에서는 모두들 신이 나 있었다.
탕비실의 맥심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었고 회사 카페테리아를 이용했는데 그 역시도 낯설었다.
누군가 '어디 다녀요' 라고 물어봤을 때 회사 이름을 말하면 다들 안다고 답해 주는 것이 으쓱하고 좋기만 했던 날들이다.
입사 후에는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는 시기였으므로, 바쁘게 일하며 칭찬도 받고, 혼도 나고.
그러다 금요일 저녁에는 삼겹살과 소맥을 먹으며 한 주를 마감하기도 하던 날들.
지금도 당시 노동요였던 엠플로의 '디제이 플레이 댓 뮤직 오네가이' 전주가 나오면 엑셀이라도 열어 피벗을 돌려야 할 것 같다.
2009년 5월
나의 이동일자에 빨간 색 동그라미를 치고 '와락 이동'이라고 쓴 그 분의 탁상달력을 봤을 때 '울컥'하던 느낌.
그 분은 기억도 못하지만, 나는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가족 외에 다른 누군가가 내가 오기를 '기다려 줬다'는 것.
아마 회사 생활 중에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아니었을까.
2012년 8월, 둘째를 낳고 복귀했는데 어쩌다 보니 조직을 이동하게 되었다.
부당한 조직이동이었다는 분개함과 뒤쳐졌다는 밑도 끝도 없는 자괴감에 많은 일을 떠안고 힘들기를 자처한 날들.
앞뒤 모르고 일하는 딸 때문에 친정엄마는 나날이 힘들어 하고, 아이들은 칭얼대고, 남편과는 사이가 계속 나빠지고.
더욱 더 일에 매진하고 싶었던 날들. 그 와중에 새벽 1시, 2시, 5시에도 보낸 메일에 화답하던 상사.
도대체 그게 뭐라고. 하지만 4개월의 업무 우정으로 평생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을 동료를 얻었으니.
2013년 1월, 제주도에 내려가기 위해 스텝부서로 이동을 했다.
2년 간의 제주 생활은 차곡차곡 블로그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끔 읽을때면 그때 그 감정과 기억들이 떠올라 편하지는 않다.
풍경은 아름답고 내 마음은 공허하고. 결핍에 대해 강박적으로 끊임없이 채우던 시간.
당시에도 언젠간 이 순간들을 그리워 하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렇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 때의 주자매가 그립기도 하다.
2015년 제주에서 올라와 사업부서로 다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조직에 있으면서 대학원에도 진학을 하게 되었다.
후회 없이 일을 해서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안타까운 건 대부분은 열심히, 일정시간을 기울이면 어느 정도의 결과물을 얻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전략의 부재, 개인역량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으나 조직 환경적인 요인도 있었다. .
환경적 요인을 역량으로 넘어서 보고자 했으나, 실패에 가까웠고, 내 역량의 부재라고 자책도 해보았는데
이러한 열패감의 근원은 결국 '인정 받고 싶은 나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누구에게. 무엇을. 그리 '인정=사랑' 받고 싶었는지.
복직 후에는 맴돌다 다시 무리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낯설기만 했다.
객관적으로 좋은 회사. 안정된 장소, 일, 복지.
회사를 떠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국은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랑의 대상은 다들 다르겠지만.
'내'가 필요한 곳을 찾아 이동한다.
이동 소식을 전할 때 만나는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울린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전일 텐데 대단하다. 용기있다.
그 회사 3년 본다. 잘 생각해라. 좋은 선택이길 바란다.
스타트업은 절대 안 된다. 애들 생각해라. 가지 마라.'
어찌 되었든 나의 입장에서 해 주는 말도 있었고
또는 '나도 그 회사 대표 안다. 그 회사 친구 안다' 등의 자신의 교제 범위를 알리는 말까지
매우 다채로웠다.
그러나 결국은 나의 선택이고 결정이다.
그들은 운동장 밖의 사람이고, 또 각자의 경기에 임하고 있으며
지금-여기, 이 순간의 경기에 임하는 사람은 나이기 때문에.
응원과 격려, 혹은 걱정어린 조언의 말을 해주는 모든 사람들은
이 회사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 분들 덕분에 내가 성장했다.
같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고, 히히덕 거리고, 누군가의 뒷담화도 같이 나누었고,
슬플 때는 같이 슬퍼해 주고, 격렬하게 싸울때면 흰자위를 더 많이 보이며 쌩하게 이야기도 했었지만
다 지난 날이다.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일부인 나는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려나.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마흔을 앞두고 이러한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일하러 간다는 것.
내가 어떻게 될까. 계속 나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