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추구의 플롯'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플롯이라고 소개한다. 주인공이 뭔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들로, 탐색의 대상은 대체 주인공의 인생 전부를 걸 만한 것이어야 한다. 중략...
독자들이 '추구의 플롯'을 따르는 소설이나 영화, 여행기를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로 그 플롯에 따라 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언제나 외면적인 목표들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기, 번듯한 집 한 채를 소유하기, 자식을 잘 키워 좋은 대학에 보내기 같은 것들. 그런데 이런 외면적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다.
- 김영하 / 여행의 이유 p23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맞은편에는 세 개의 건물이 있었다.
그 중 바로 맞은 편 가운데 건물이 화염에 쌓여 불타고 있었는데, 소방차가 온다고는 하지만 소식이 없고
건물 전체를 삼켜 먹을 듯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옆의 건물에는 그 불이 옮겨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건물 앞에 내가 서 있었는데 갑자기 건물 안에서 한 남자가 옷을 털며 나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자기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고' 하며 싱긋 웃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이러한 불 꿈을 꾼 것은 처음이라 너무 생생해서 눈을 뜨자마자 남편에게 이야기 하니
바로 복권을 사라고 한다. 더 꿈 이야기 하지 말라며.
복권에 당첨될 행운의 꿈이라면 왜 내가 있는 곳에서 불이 나지 않고
내가 불이 있는 곳으로 갔었던 것일까.
대출을 남편에 비유한 회사 언니를 만나 점심을 먹는 중
'그래서 전 어디로 가야 할까요?' 물었다.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포크로 타이 국수를 돌돌 말며
'이전에 있던 조직으로 가야지 뭐. 거기만 사람 필요해. 하던 거 해야 되지 않겠...' 호로록 넓적한 면을 입에 넣고 말끝을 흐렸다.
대학원 가서 몇 년 공부한 경험으로 관련 부서를 기웃거렸던 나의 무모함에 다시 한 번 몸을 떨던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모든 것이 현실로, 제 자리로 원위치 되는 듯한 기분.
'그렇구나...그렇구나'를 계속 되뇌이며 자리에 앉아 전도서 3장을 계속 반복하며 들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구절을 되뇌이며 앱을 켜니 중단에 낯익은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
내 눈에는 대문짝만 하게 보였을 정도.
2년 전, 앱 출시 직전 프로젝트가 중단되어 팀을 꾸려 나가 창업한 분들.
무언의 힘에 끌려 점심을 사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결국 대표인 분과 점심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바쁜 그녀와는 약속이 싶지 않았고, 약속이 잡힌 날에는 주선자 분의 일정으로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발령을 받아 이동했음에도
나는 계속 꿈에 연연했으며, 세 개의 건물 중 대체 그 불은 어디일까 궁금해 했다.
지금의 회사인 대표님을 만나 점심을 먹고 난 후 한 번 더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 그 날.
대화 끝에 웃으며 불꿈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몸을 앞으로 굽히고 사뭇 진지하게 들으며 한 마디 했다.
'신기하다. 내 사주가 온통 불인데'
프로이트는 꿈을 드러내지 못한 무의식의 욕망들이 의식의 표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나 나는 그것을 무의식의 욕망이라기 보다 우주의 메시지, 즉 내가 믿는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세부적인 조건에 대해 메일을 받는 날에는 심지어 시어머니가 환한 얼굴로 밝은 스카프를 매고
나를 보며 활짝 손을 내밀기도 하셔서(결국 붙잡지는 못했지만) 남편의 현실적인 조언도 귓등으로 유유히 날려 보내며
비합리적 신념으로 똘똘 뭉쳐 '가야만 한다'로 결론을 냈다.
입사한지 이제 이 주째.
첫날 들어가자 마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바쁘게 일하는 동료들을 보고
10살 이상 어린 친구들에게 운영 방법을 하나 하나 배우고 휴일 당번과 아침/저녁 당번을 번갈아 가며 일하고 있다.
2초 단위로 계속 보여지는 슬랙과 단톡방의 업무와 유머가 한 데 어우러진 곳에서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차리는 중이다.
벚꽃놀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함께 율동공원에 가서 갑자기 2인 3각 달리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체육회를 하던 중 나보다 16살이나 어린 친구와 한 짝이 되어 신고 있던 운동화 멀리 보내기를 하다 처참하게 넘어지며
허리를 부여잡고 '나는 지금 누구, 여긴 어디인가'를 생각하기도.
너무 부끄러워서 넘어질 당시에는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꼬리뼈 근처를 주무르며 남편의 내가 뭐랬나의 의미가 강렬히 담긴
눈빛과 한숨을 들으며 불편했다.
그렇지만 휴일 근무를 하고 돌아오는 길
나보다 10살 이상 어리지만 훨씬 스마트한 동료들의 넘치는 유머와 활기.
그리고 해야할 것도, 또 할 수 있는 것도 많아 보이는 조직에 속해 있다는 기분이 즐거웠다.
비장하게도 꿈과 전도서와 나에게로 온 그 분의 메시지까지 들먹이며
추구의 플롯을 따라 이직의 당위성을 찾았으나
체육대회 날 율동공원의 잔디밭에 내동댕이 쳐진 순간 나의 비합리적 신념이었음을 바로 깨달았다.
엉덩이 근육을 타고 흐르는 욱신거림이 현실감각을 되찾아 주었고
휴일에 동료들과 병맛코드를 주고받으며(주로 받고 있지만?) 일을 하면서
새롭게 열린 세계에 대해 계속 놀라워 하고 있다.
이 놀라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고맙게도 아직까지는 즐겁다.
호기심은 부족하지만 다행이도 지적 허영심은 아직 남아 있어
새로 배우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전혀 없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모르는데 아는 척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이라고 뻔뻔히 생각하며
생물학적 나이만 어릴 뿐 나보다 현명한 선배들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수 받고 있다.
즐거운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