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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19년 12월 31일

by 와락 2020. 1. 2.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 

 

 

 

 

 

 

매해 마지막 날이 되면, 새해를 맞는 설레임과 새로운 각오가 생기는데, 

시봉이랑 연말 대학병원 응급실에 다녀와서인지... 그 이후 가족 여행으로 갔던 제천에서도 큰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19년을 돌아보면 대학원도 졸업하고,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으로 이직도 하고...

작년 이맘 때만 해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오늘이다. 그렇다면... 난 지금 행복한가? 

아니 그 전에 앞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교수님의 책을 읽고 나니, 한번 되묻고 싶어졌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 하다 말고 독서실 책상 밑에 이불을 깔고 누워서, 대학교 입학 후의 나를 상상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망상인데... 현재의 삶에서 도피하고. 그 시간들 덕분에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에도 꿋꿋히 잘 버틸 수 있었다. 

이십 여년이 흐른 지금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시간여행자가 될 수 없음에도. 과거를 혼자 돌아보며 '어땠을까'를 상상한다. 

 

 

 

2019년, 서른 아홉의 나는 '이직'이라는 큰 결정을 하고, 스타트업이란 조직에 적응하느라 애를 썼다. 

새롭고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좀 더 유연해지려 노력했다고 해야 할까. 

이 회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나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했을 듯 싶다(얼마나 객관적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리고 '꼰대' 스피릿이 강화되기 전에 퇴사를 하게 되서 다행이다.(이것도 아마 기존 회사에 있었음 몰랐을...) 

연말이라 내 선택을 합리화 시키고, 정당성을 주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안주 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한 나에게 '잘했고, 애썼다' 등 두드려 주고 싶다. 

나와 보니, 눈이 떠지는 기분. 

 

 

경선생은 올 한해 대체로 재미 없었다고 말했다. 학년 말이 되기까지 단짝 친구를 사귀지 못해서 인지, 심드렁했다.

발레를 집중적으로 하려다가 그만 둔 것도 한 몫한 듯 싶고. 여러 모로 아쉬운 열 살이지만.

몸도 마음도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 엄마로서는 지켜볼 수 밖에.

피아노를 새롭게 도전하고, 캘리그라피는 올해 초부터 연달아 하고 있는데 가장 즐거워 하는 수업이다. 

바이올린은 매주 배우고 있는데, 연습은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지만, 종종 제대로 된 곡을 연주하기도 해서,

아 구력은 무시 못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영어 실력은 나날이 늘어서, 이제 듣기는 엄마를 넘어선 것 같다(이미 오래 전)

휴직 기간 동안 열심히 도서관에서 책을 나르고 같이 읽었던 시간들이 결코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서 기쁘다.

 

 

시봉이는 아홉 살 인생을 가열차게 보냈다. 친구들 사이에서 삼각관계로 울고 웃고를 반복했고(지금도 진행 중)

피아노도 새로 배우면서,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악상을 마구 곡으로 표현해 내는데, 너무나 신기할 뿐이다. 

예를 들어, '아빠가 화낼 때의 두려움' ,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멜로디' 을 피아노 건반위에 옮긴다. 

나에게는 없는 '재능'이란 것이 우리 아이에게 있는 것 같아 너무 신비롭고. 

올 해에는 '회장' 선거에도 출마 했는데, 야심차게 공약을 제시했지만 '1표'를 얻고 절망했다. 그 1표도 본인이 찍은거라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통곡을 하며 엄마에게 전화도 했으나, 연이어 '부회장'에 출마해서 '4표'를 얻었다. 

정말 패기왕이다. 새로운 회사에서 적응하며 '쉽지 않구나' 하던 나에게 가장 영감과 용기를 준 '패기왕' 

 

 

남편은 교회 구역장까지 맡았으나, 늘 절제하는 삶의 태도를 고수하면서 선을 넘지 않는 자세로 가정-회사-교회의 루틴을 유지했다.

늘 선을 넘나드는 시봉이가 남편의 가장 큰 숙제였던 듯 싶은데..  어느 날 자기 계발서류의 책을 혐오하던 남편의 책상에

'평정심, 나를 지켜내는 힘'이란 책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이 사람이 애쓰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말에는 반값 할인 찬스를 놓치지 않고, 집 앞 헬스장에 등록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운동을 하러 나가는 중이다. 

ROI, 효율, 성실, 이런 단어들이 핏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2020년, 마흔이 되면 하루키의 말처럼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먼 북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매일 오후 2시면 어김없이, 학원을 빠지고 싶다는 시봉의 연락만 받고 있다.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명상앱도 다운 받아서 '눈 밟는 소리'를 듣는데

아이들이 '과자 부스럭' 거리는 것 같다고 해서...

모두가 잠든 후에, 나를 부르는 '그 소리'를 찾아야 겠다. 

 

 

 

 

 

19년 마지막 날, 숙소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