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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결혼 15주년

by 와락 2023. 3. 25.


I know you.
With every passing moment, you fear you might have missed your chance to make something of your life. 
Every rejection every disappointment has led you here.

난 당신을 알아
늘 뭔가 이룰 기회를 놓쳤을까 전전긍긍하지
모든 거절과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중에서 
아이들과 함께 거실 한 면을 스크린으로 만들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앤 워스 영화를 감상했다. 
정적인 영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혼돈의 도가니.
양자경의 멀티버스 세계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아이들과 같이 본 것을 후회했으나...
운전 중 잠시 신호등 앞에서 대기 하게 되거나,  잠든 남편의 얼굴을 보면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나의 멀티버스, 다른 세계에서 나는 이 남자를 만났으려나.
이루지 못한 많은 꿈들을 다른 멀티버스에서 잘 실현하고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어디쯤일까.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무감하게 살아가는 에블린처럼 
우리 부부는 퇴근 후에 만나면 무표정한 얼굴로 집에 들어와 
주자매에게 저녁을 먹이고 뒷정리를 하고, 집을 간단히 치우고
유산균 먹어라. 양치 해라. 11시 전에는 자야지. 키 커야지. 등등의 잔소리를 한 후에 
방전된 배터리 처럼 너덜너덜해진 얼굴로 침대에 쓰러져 눕는다. 
결혼기념일.
2월 23일 그 날이 다가오면 남편은 미리 하룻밤 지낼 숙소를 예약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잠시나마 육아에서 벗어나 하루 정도는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는데
가기 전날까지 회사일과 사춘기 주자매와의 일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서 
호텔에 도착하고 웰컴케이크를 보고서야 실감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지
사랑하는 남편과의 1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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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MZ세대들이 많이 다닐 것 같은 압구정 한복판에 있는 안다즈 호텔에 갔다.
저녁은 뜨끈한 찌개를 먹고 싶어 대우역삼부대찌개를 가자고 남편에게 제안하여
무려 버스를 타고 움직였으나... 아차차 토요일은 휴무라고 한다.
평소 같으면 잔소리 10분 정도 사건이지만 결혼기념일이므로
남편이 여유롭게 다른 부대찌개 가게를 가자고 제안한다(기념일은 자동 까방권 1회 생성)

생각보다 찾아와서 먹을 정도의 맛은 아니었으나
기념일이니까, 간만에 둘 만의 저녁 데이트이므로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숙소로 돌아간다. 
간단히 씻고 누워 TV를 보다 10시 좀 넘어 슬슬 졸려 하는 남편을 두고 
드라마를 한 편 본 후 편안히 잠 드는 결혼기념일
 

01
알땅콩과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 맥주 거품 뭐죠? (쯧쯧)

 
 
 
그래도 다음 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지하에 있는 수영장에 다녀왔다. 
지하라 아쉽긴 해도 물도 깨끗하고 사람들이 별로 없어 여유롭게 이용하고
조식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예전보다는 식사량이 줄어 아쉬워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남편
시봉이를 아기 띠에 매고 힐튼 조식뷔페를 다니던 삼십대의 남편이 생각난다. 
경선생은 신이나게 초코 머핀을 먹었지.
 
이제 우리는 핸드폰으로 열심히 음식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 보내주기도 한다. 
시봉이는 같이 먹고 싶다고 부러워하지만
예전처럼 보고 싶다고 엄마 아빠 빨리 돌아오라고 하지는 않는다... 
 

012
귀여운 오리 머핀. 표정이 다 다른게 뽀인트

 
 
 
남편과 나는 이 세계에서 만나
연애를 하고 세계여행을 해 보겠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생의 가장 큰 결정을 했다.
 
그리고 만 15년 
다행히도 잘 살고 있다.
 
 
영화 속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다른 멀티버스에서 
각자의 인생을 살며 멋진 커리어를 쌓고 성공해서 만나지만
갑자기 양조위 같은 느낌의 웨이먼드는 아련하게 이야기 한다. 
다음 생에는 당신과 빨래방도 하고 세금도 내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어쩌면 
주자매와 복닥거리며
회사일에 치여 아이고 바쁘다 바빠.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삶이지만 
다른 멀티버스에서 웨이먼드처럼 모든 것을 다 이루었을 듯한 얼굴의 내가
'다음 생엔 남편과 함께 아이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 라고 할지도-
 
결혼 16주년을 기약하며
다정하게 올 한 해도 잘 살아봅시다. 
Please, be kind. Especially what we don't konw what's going on. 
 
 
 
 
 

양조위 선생님이신 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