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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남산러닝(feat.왕돈까스)

by 와락 2024. 1. 14.

주자매는 교회 수련회 1박 2일

남편은 회사 등산 

어머니는 주말 영어 수업

 

매주 토요일은 주자매 학원 스케줄에 맞춰 일정이 진행되었는데

갑자기 '나만의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예상치 못한 시간과 돈이 생겨도 계획이 없으면 흐지부지 되곤 했는데

달리기라는 취미가 생기니 여유가 주어지면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기도 하고

혼자도 할 수 있고, 아주 큰돈도 들지 않으며 건강에도 유익한 여간 효율적인 취미가 아닐 수 없다. 

 

남산은 지난해 회사 동호회에서 한 번 다녀왔는데

북측순환로를 힘들게 올라가 팔각정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서

왕돈까스를 먹고 헤어지는 여정이었다. 

밤의 낭만도 있지만 달리는 동안 주변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아

언젠간 가야지라고 마음먹고 있던 중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고

무엇보다 주자매 픽업 시간을 지켜야 하는 제한도 없어서

아이들이 수련회 간다고 집 밖을 나서자마자 

가볍게 짐을 싸고 옷을 갈아입고 지하철 여행 출발. 

 

지하철 여행에는 독서가 필수

마쓰우라 선생님 책도 한 권 챙겼다. 

이북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책을 샀는데,  쓰쓰슥 형광펜으로 인상 깊은 구절들을 칠하고

포스트잇으로 표시하다 보니  책이 주는 이 실감.

샤라락 펼쳐지는 책의 느낌이 참 좋구나.

 

 

드디어 충무로역 도착

4번 출구 앞에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북측순환로를 향해 출발

카카오맵을 따라 올라가는데 지난번 동료들과 가던 길이 아니라 살짝 두렵기도 하지만 어찌어찌 길을 찾았다.

짧은 5분 사이 두려움, 초조함, 난감함 등의 감정이 섞였다가 한 번 와봤다고 

아는 길이 나오니 어찌나 반갑던지.

 

중간 지점으로 합류한 지라 어리둥절하다가 혈기 넘치는 러너들의 뒷모습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설레고 흥분되는 이 기분. 잘 뛰는 사람들 뒤를 쫓으며 그 호흡을 느끼면 아 이건 내 호흡 아니다.

못따라가겠다 포기하는 마음도 생기면서 동시에 부럽고, 그 활기를 잠시나마 같이 느낄 수 있어 즐겁다. 

내 호흡과 발동작이 아니라고 나를 탓하는 마음도 없다. 어차피 왕복하다 보면 또 만난다.

나보다 좀 더 빨리 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경치와 풍경과 공기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달리다 보니 이런 여유도 생긴다. 괜찮다. 나도 뛰고 있다. 괜찮다. 

 

지금 여기 없었다면 내가 했을 법한 일들을 떠올린다.

넷플릭스 '나는솔로' 시청

회사 사업계획 문서 만들기

낮잠 자기 

빨래하거나 화장실 청소

 

무엇을 해도 휴식이기도 하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달리기를 선택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참이다. 

 

 

토요일 낮의 남산은

젊은 러너들과 등산, 산책을 즐기는 어르신들 

크게 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았다. 

순환로 중간에는 러닝크루 모임인지 돗자리를 펴 놓고 플랭크 등의 간단한 운동도 병행하고 있었다. 

깔깔거리는 하이톤 여성크루들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파이팅. 구호도 외치며.

 

왕복을 하고 이대로 가기에는 아쉽기도 하고 

슬슬 허기도 들어 힘을 내어 돈까스를 먹으러 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미리 일정에 있었으면 무리하지 않았을 텐데... 잘못된 판단...

거리를 계산해 보니 2.7km

이 정도 거리면 올라갈 수 있다는 교만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버스를 탈 것을... 호기롭게 뛰다가 결국 걷다가 땀이 식으며 춥기도 하고 

스마트폰 배터리까지 얼마 남지 않아, 팔각정 도착할 무렵에는 돈까스고 뭐고 이대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ㅎㅎ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정신줄을 붙잡고 힘을 내어 돈까스 집으로 향했다. 

대체 돈까스라 뭐라고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가.

이런 집요함을 재테크에 발휘할 수는 없는가. 나님이여.

 

 

결국 원조 왕돈까스에 도착하여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침을 꼴깍 삼키다

김이 모락모락 방금 갓 튀긴 왕돈까스가 나오자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이거지. 

나 혼자 남산 러닝코스도 잘 찾아오고(이게 뭐 어려운 일인가 싶지만 길치인 나는 그저 뿌듯할 뿐)

왕복 코스도 완료하고 돈까스까지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싶었으나 체력이 부족해서 바로 충무로역으로 향해 짐을 찾고

간단히 옷을 갈아입은 후 지하철에 탑승했다. 

책을 펼쳤으나 급하게 혈당이 올라가서인지 꾸벅꾸벅 졸다 집에 도착 

 

도착해도 오후 3시 30분이 채 안돼서

씻고 빨래를 돌리고 사과를 한쪽 먹고 나른한 오후를 즐겼다. 

 

주자매의 빈 자리가 이렇게 크구나 자유함을 만끽하면서

아이들이 성장하고 내 시간을 오롯히 즐기게 될 50대가 기대되기도 했다. 

그 전까지 주자매와 마흔 중반의 나와 더 잘 지내야겠다 다짐한다. 

먼 훗날 이 글을 다시 볼 때 지금의 나 덕분에 50대의 내가 흐뭇할 수 있도록

미래의 나여, 그 기대를 내가 채우리니 기다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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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러닝코스, 뿌듯한 주말이었다. 돈까스는 남산원조왕돈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