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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결혼 16주년

by 와락 2024. 3. 17.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의 "자아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결혼 생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결혼 생활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다." 남편도 나도, 이 순간 이 결혼을 유지하기로 선택하고 있는 존재다. 언제든 서로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정감의 무게에 잊혀 버린 관계의 긴장감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1년에 하루쯤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결혼기념일에 결혼 연장 계약서를 쓰면서 서로가 계속 이 결혼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흔의 문장들 /유지현 

 

 

 

2월 23일 결혼기념일

올해는 16주년을 맞이한 기념으로 16km를 달려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제주도 마라톤 대회를 제안했는데 남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대신 경포호 근처의 스카이베이를 예약해서 호수 한 바퀴를 가볍게 뛰는 것으로 결혼기념일 세리머니가 결정되었다.  

 

강원도는 여러 번 갔었는데도 늘 장소에 대한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속초와 강릉 그리고 양양을 늘 헷갈려 해서 남편은 같이 가봐야 소용없다며 실망을 내비치는데

이번 강릉 경포호는 확실히 각인 된 듯... 기억력이 점점 쇠퇴하는 나로서는 몸의 근육을 이용한 감각 기억이 가장 확실한 것 같다(그중 일등은 혀의 미뢰에 선명히 남긴 맛의 기억)

 

우리가 늘 어딘로가 떠나는 2월의 날씨는 으슬으슬하게 비가 내리거나 

기온이 올라가도 미세먼지로 하늘이 뿌옇거나 

늘 아쉬운 2월의 그런 날들이었는데 이번은 달랐다.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오르는 풍경.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강원도 가는 길, 전날 내린 눈들이 나무 위에 쌓여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에 그저 감탄하며 숙소로 향했다. 

남편도 운전하면서 기분이 좋은지 실은 강원도가 아니고 삿포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부부간에 유머코드가 맞아야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데 아직 이 부분은 서로 잘 맞아서(정확하게는 남편의 유머를 내가 좋아한다) 다행이다. 

 

이런 멋진 풍경을 남편과 누릴 수 있어 감사하고 기뻤지만

집에 두고 온 주자매가 생각나 약간의 미안함도 있었는데 사진 몇 장 가족 메시지 창에 보냈으나 답도 없다.

아무렴. 그 무섭다는 예비 중2 보유가정이므로. 

 

 

숙소 도착 전, 점심은 남편이 회사 사람들과 맛있게 먹고 왔다는  '정화식당'이라는 오징어볶음 가게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평일 점심, 사람들이 몰리기 직전이라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는데 오징어볶음의 정석이라고 해야 할까.

보기에는 뻘건 고춧가루 때문에 매울 것 같았는데 적당히 매콤하고 달큼해서 맛있게 먹었다.

 

맛난 점심을 먹고 드디어 경포호가 앞에 펼쳐진 스카이베이로 출발 

호수뷰로 예약하려고 추가 비용을 냈다고 남편이 힘주어 이야기 한다.

결혼기념일만큼은 주자매가 1순위가 아니라 부부의 시간, 특히 나를 위해 애써 주고 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잠시 휴식한 후 

저녁 먹기 전 경포호수를 두 어 바퀴 돌기로 했다. 한 바퀴가 약 5km 남짓이라 두 바퀴 정도 돌면 10km 

코감기 때문에 코로 숨쉬기가 힘들어 조금 버겁긴 했지만 그래도 기쁘게 달렸다.

달리기의 취미가 생긴 후부터는 어딘가로 여행을 갈 때 주변 숙소에 달릴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게 된다. 

이전에 회사분이 비슷한 이야길 할 때는 굳이 여행 가서도 뛰어야 되는가. 대체 왜.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말이다. 

 

 

천천히 뛰며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가 좋다. 

이십 대 남편과 결혼할 시점만 해도 마흔 중반의 결혼기념일에 이렇게 달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십 년 후의 결혼기념일에도 남편과 가볍게 달리며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 

 

두 어 바퀴를 뛰고 씻고 나오니 개운하면서도 살짝 피로감이 몰려왔다. 

저녁 먹으러 주변 상점을 거닐다 일본식 돈가스, 덮밥집에 가서 먹기로. 

16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합니다. 결혼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한 해 더 연장하는 약속의 술잔을 부딪치고 눈 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은 스타벅스에서 동해 바다를 보면서 호사스럽게 베이글과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셀카 찍기에 여념이 없는 앞자리 아이들을 보면 더욱더 주자매가 생각난다.

저 멀리 하얀 눈으로 덮인 해변의 연인들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예쁘게 찍어주느라 30분째 해변의 주요 촬영 스폿을 차지하고 있다. 이십 대 남편과 짧은 연애 기간에 카메라로 남편이 사진을 찍어준 적이 있지만 해변의 연인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열정과 사랑이 대단하다. 정말 리스펙.

그리고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5명 정도의 아주머니 그룹. 바다를 배경으로 서로 찍어주고 같이도 찍고 깔깔 웃는 소리가 가 드리는 것 같다. 다들 남편은 집에 두고 하루 놀러 오셨나 보다. 곱게 화장을 하고 서로 이야기해 주겠지. 

어머 딱 좋다. 지금. 예쁘게 나왔어. 다시 찍어줄게. 

순간 오양과 정지가 떠올랐는데 사진도 좋고 강원도도 좋지만 무엇보다 우리 친구들과 함께 달리면 더욱 좋겠다. 

 

 

체크아웃 전에 숙소의 헬스장에서 가볍게 기구 운동을 몇 가지 해 보고 돌아와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어제와 같이 멋진 풍경을 보면서 돌아가는 길. 1박 2일인데 남편말대로 삿포로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남편과 나는 16년째 이 결혼을 유지하기로 선택하고 매해 암묵적인 연장 계약 중이다.

예상치 못한 여러 변수들로 특약 조건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존중하고 결혼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도 우리의 계약에 어떤 사항들이 추가될지 모르겠지만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이행할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17번째 결혼기념일은 어느 장소를 뛸 것인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우리는 눈의 고장으로 가는 중입니다

 

유명하다는 정화식당 오징어 볶음 또 생각나네요

 

한 폭의 그림 아닌가요, 스카이베이 근처 스타벅스 바다뷰
16주년 저녁식사

 

형언할 수 없네요. 겨울바다의 정석

 

바다를 보며 아침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