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중년의 위기’라고 하는 이 시기를 나는 ‘중간항로Middle Passage’라 부르고 싶다. 이 시기에 우리는 삶을 재평가하고, 때로는 무섭지만 언제나 해방감을 주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설 기회를 갖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온 역할들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거짓된 자기self를 쌓으며 살아왔다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잠정적인 성인기를 보내왔을 뿐이라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진짜 존재를 만날 수 있는 2차 성인기에 들어설 수 있다.
-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 제임스 홀리스
제목에 이끌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첫장부터 밑줄긋고 싶은 충동에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아침에 주자매를 깨우고 검정 빨래를 돌린다. 남편은 알아서 척척 챙겨 먹고 간다. 계란 후라이라도 해줄까라는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파프리카를 세 박스째 샀는데 그만 사라고. 토마토 부터 먹어야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고. 남편은 여름 즈음에 한 번씩 목감기에 걸린다. 회사에서 지원 받은 혈당기로 2주 가량 혈당을 관리한 이후 당뇨 전단계에 가까운 수치를 확인하자 탄수화물을 급격하게 줄이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닭가슴살과 야채만 먹는다. 점점 갸름해 지고 뱃살도 줄어든 듯 하여 좋았는데 짜증이 더 심해진 것 같아 제발 탄수화물을 먹으라 이야기 하는 중이다. 아침에 얼굴 보니 핼쑥해 졌는데 그 파리한 얼굴이 잘생겨 보이는 걸 보니 어쩌면 나야 말로 중년의 위기가 제대로 온 것인가.
매주 화요일마다 뵙는 PT 선생님의 바다 같은 등짝을 보면 와 멋지다 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없어서인지 주자매가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를 사귀었으면 하는 소망도 생겼다. 혹여 아이들에게 잘못 투사할까봐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고.
책을 읽던 중
저자의 지인 중 한 명은 박사학위, 가정, 저서 출판, 안정된 교수직까지 원하던 모든 것을 28세에 이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37세에 우울증이 터져버렸으며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이전 삶에 대한 과잉 보상으로.
그는 행복했을까?
중간항로가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내면의 신호들을 느끼며 과잉보상의 삶에 대해 가끔은 퇴근길에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 모든 비장한 책임감을 뒤로하고 훌쩍 떠나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외국의 마을에서 사부작 사부작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어떨까. 엄마, 아내, 장녀, 며느리, 직장인의 타이틀을 내려놓고.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무언가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ㅎㅎ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나란 사람에 대한 작은 탄식을 하면서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어릴 적에는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집안을 일으키는 영웅이 될 거라 아무 근거없이 믿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무너지고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 여러 감정들이 뒤섞이며 나타나는 공허함속에 중년의 위기를 맞닥뜨리는 중이긴 한데 그 혼돈 속에서도 나의 충족되지 못한 기대를 주자매에게 투사하는 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에 큰 공백 하나는 뚫려 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구멍이 메워질 거라 생각했지만 가끔 그 구멍을 잊을 뿐 메워지는 건 모르겠다. 큰 돈을 벌고 지금과는 사회적 위치가 확연히 달라지면 또 모르겠지만.
다만, 이 나이가 되서 깨닫는 건 나의 배우자 역시 나와는 모양과 크기가 다른 공백 하나는 갖고 있을거고 역시나 나를 통해 채워지길 바랬을지 모르나 살아가면서 그럴리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헤어질 결심까지 할 수는 없을테니 그럴 때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신상 농구화 리뷰 영상을 보면서 채워지길 혹은 그 공백의 존재를 잠시나마 잊기를 바랄 것이다.
중간항로를 현명하게 헤쳐 나가기를
실망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그게 또 나이니깐요.
다시 한번 마흔 중반의 나님에게 기대해 봅니다.
잘 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