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나도 각도 큰 변화구를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직구만 던지면 얻어맞기 일쑤니, 변화구도 섞어가면서 살아가시길 바란다. 사는 데는 9회 말도, 역전패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 모른다. 이길 때까지 그렇게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쓸 만한 인간>, 박정민
12월 23일 아침에 파트너사 대표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새벽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늘 웃는 인상의 호탕한 대표님이었다.
그 분과의 카톡 마지막 대화는 그로부터 열흘 전이었다.
2년 만에 갑작스럽게 톡이 와서 재계약 이슈 때문인가 싶었는데 입금일을 좀 앞당겨 당일에 처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재무팀에 말씀드려 금일 당일 요청 드렸습니다.
5시 이후로 처리되니, 6시 전후로 확인해 보시면 될 듯합니다!'
'서로 감사합니다'로 마무리된 대화가 끝이었다.
발인이 끝난 직후에 부고소식이 담긴 공문이 와서 장례식장도 참석하지 못했다.
마흔일곱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둔 아내분 마음이 어떠할지...
카카오톡에 프로필에 있는 어린 딸들을 보니 30여 년 전 우리 집 모습 같아 연말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분과의 마지막 대화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22년도 대화인데
회사 물류센터를 동의 없이 통보식으로 이전하는 일이 왕왕 발생하여 갈등하는 내용이 있었다.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다 보니, 갈등 상황에서도 날쌔게 클레임 하는 일이 잦은데
3년 전에는 업체가 대금을 주지 않고 부도 위기에 몰려, 실무를 진행했던 팀원과 다른 팀 직원까지 대동해서 현장에 찾아가 소리치며 대표를 불렀다. 마치 드라마에서 보던 한 장면처럼 '대표 어딨 냐'며 소리를 질렀고 '90만 원'정도 받아냈다.
몇 개월 전에는 환경부 이슈가 발생해 제조사로부터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저 회사원으로 내 역할을 해내는 것뿐이지만 거래처 담당자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그저 씁쓸함 뿐이다.
나라도 어지럽지만
내 마음도 너무 혼란스러웠다.
연말의 혼란함과 씁쓸함을 뒤로하고 회고를 해 본다.
24년에도 성실하고 근면하게 지내왔다.
꾸준히 달렸고 결국 풀마라톤 42.195km를 끝까지 걷지 않고 뛰었다.
연초에 어디 한 번 해볼까 기웃거리던 고강도센터 등록을 시작으로 집 앞 운동센터에 등록해서 주 3회 이상 출석하며 근력운동도 했다.
이제 센터에 가면 전과 다르게 두리번거리지 않고 머신 앞에 서서 몇 가지 운동은 할 수 있다.
코로나 이후로 업체와의 미팅도 간소화되었고 개인적인 만남도 대폭 줄어서 외부로 얻는 아웃풋이 줄었다.
자극이 부족해서 내돈내산 커머스 강의도 들었다. 강의팔이에 낚인 기분이긴 했지만 얻은 것이 있었다 위로해 본다.
만 6년 가까이 같은 회사에서 같은 동료들과 지내다 보니 시간을 다르게라도 써서 변화하고 싶었다.
점심은 주로 혼자 먹고 책을 읽었다. 기록을 한 것도 있고 하지 않은 책도 있지만 월에 5~6권은 꼬박 읽었다.
연말에는 성인들을 위한 피아노 학원에도 등록했다.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 역시 무심코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손가락이 움직여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교회는 봉사도 출석도 그만두었다.
1년 7개월 가까이 봉사를 했는데 점점 요청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마치 회사 같은 기분이랄까. 어느 날은 토요일까지도 회사일을 하고 일요일마저도 교회 다녀와서 저녁 8시가 돼서야 편집일이 끝났는데 정말 힘들었다. 기복신앙이 근근이 깔려 있으므로 이렇게라도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말 미신이 따로 없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것 외에 교제를 하는 모임이 있는데 힘들게 간 저녁 시간을 마른 빵으로 때우며(간식을 가져오신 집사님은 감사하지만) 남을 정죄하고 결론짓는 이야길 듣던 어느 날에 내 안의 '무언가' 건드려진 것 같다. 특히 모임의 바뀐 리더분이 바로 사과하지 않고 본인의 죄를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로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다니기로 결심했다. 종교는 잘 모르지만 개신교에서 말하는 예수님과 자신만의 이 튼튼한 관계. 주가 나를 용서해 주시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듯한 이 장면이 불편했다. 예수님이 오셔서 너는 죄가 없느냐라고 하면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평일 저녁 황급하게 업무를 마무리하고 지하철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 탄 후 힘차게 언덕을 올라가 그런 소리를 들으며 2시간을 보내기엔 나의 인내심 자원은 바닥났다.
경 선생은 올해도 학생회장 선거에 나갔고 부회장이 되었다.
처음 보는 중간고사에서 모든 걸 쏟아붓고 최선을 다했으나 영어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려 몹시 실망했다.
문법이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 그래도 그다음 시험에는 올백을 맞기도 했다. 학교 시험이 쉽다고 해도 정말 대견하다.
성취의 기쁨은 계속 그녀를 달리게 하나 보다. 동네 학원에서 본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상금을 받기도 했고(무려 10만 원) 학원차에 이름이 올라기기도 했다고 한다(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부모가 모르는 경선생의 세계는 계속 확장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적당히 모른 체하기도 하고(적당히라고 썼지만 진짜 모를지도) 기다려주고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종종 이야기해 주는데 나의 중학교 시절에 비교해 보면 훨씬 성숙한 것 같다. 벌써 중3이 된다니 믿을 수가 없다. 아직도 잘 때 보면 어린 모습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시봉이는 올해가 피크였나. 아님 아직 남아 있는 것일까. 아직 중학교 2학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진행 중이라고 해두자.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희로애락을 동시다발로 누리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학교에 갈 때면 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찾다가 학교에 같이 가는 친구에게 전화로 사과를 하면서 후다닥 나가기 바빴다. 저녁에 돌아오면 잠시 괜찮았다가 밤늦게 학원에 지쳐 돌아와서는 시리얼을 먹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기도 했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우기도 했는데 꽤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 같다. 제법 알아듣는 문장이 있었다. 정말 숙제는 하는 것이냐. 공부는 하는 것이냐라는 물음이 들었으나 2학기에 처음 치른 기말고사에서는 평균 97점을 얻어 의기양양했다.
가을에는 남편과 함께 가서 풀배터리를 받기고 했는데 그 이후로 남편도 나도 아이를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남편의 머리색은 점차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흰머리들이 검은색을 압도하여 회색빛인데 얼마 후에는 백발이 되지 않으려나.
농구는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꾸준히 토요일 저녁이 되면 근면하게 출석 중이다. 연말에 개근상 못받았는지 묻고 싶지만 빈손이다.
갑자기 달리기에 심취한 아내와 같이 마라톤 대회에도 다니며 연초에는 예정에 없었던 풀마라톤까지 완주했다.
가족들을 위해 성실하게 여행을 계획하고 효율적으로 동선을 기획한다.
본인의 통제하에 진행되면 유쾌하지만 경계를 벗어나고 예측불허의 순간이 오면 참기 어려워한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부쩍 더 힘들어했다. 남편의 인내심 자원도 한계였던 듯싶다.
시봉이의 풀배터리 결과를 들으면서 남편도 본인을 좀 더 이해하고 너그러워지길 바랐는데 노력 중인 것 같다.
작년에 이후 행방이 궁금했던 페라가모 벨트는 어느샌가 남편의 허리춤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 바다는 24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바다가 있던 자리에는 바다의 흔적이 놓여있다.
경선생 방을 가다가 닫히는 문에 머리가 찧어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생각할 때마다 보고 싶고 슬퍼서 블로그에 따로 쓸 수도 없었다.
시어머니 산소 옆 양지바른 곳에 묻었는데 성묘 갈 때마다 바다를 만난다.
출근길 겨울이 되어 부쩍 털이 오른 작은 참새들을 볼 때마다 바다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난다.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길 기도한다.
23년에는 '버텨내기'에 충실했고 24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버텨내다 보니 어느 순간 동력이 끊긴 기분이었는데 그 후로는 좀 버거웠다.
그럼에도 나를 돌보려 애썼고 즐거운 순간들은 늘 있었다.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쌓아 놓고 읽기도 하고
새로운 수업도 들으러 가보기도 하고 현장에 온 많은 사람들을 보며 크게 자극받기도 했다.
오양 덕분에 재즈페스티벌에도 참여하여 야외에서 흥에 취해 보기도 하고
GD의 마마 복귀 무대를 여러 번 돌려보며 즐거워했다.
GD가 좋은 것도 있겠지만 한창 그가 활동했던 시절의 내가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에 교회 문제로 남편과 잠시 갈등을 겪고 여러 이야길 나눴는데 그 이후로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내 고집으로 이직을 했고 후회는 없으나 지금의 상황이 기대와는 다르고 더욱 더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향하고 있어 답답했다. 정말 듣고 싶지 않았던 남편의 ‘내가 뭐랬어’가 시전 되었는데 오히려 인정하고 나니 좀 더 후련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24년에는 변화구 하나 없이 직구만 오롯이 던지다 어깨가 빠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렇지만 박정민 배우의 글 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는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연말에 여러 일들로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돌아보니 올 한해 감사하고 즐거운 일들도 많았다.
아이들과 부산 여행도 올 해만 두 차례 다녀왔다.
진도도 공주도 방문해서 맛있는 음식도 좋은 풍경도 보고왔다. 오양 덕분에 재즈페스티벌도 난생 처음 참여해봤다. 야외 무대에 자유롭게 앉아 음악도 듣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후에 우리는 재즈 공연까지 보게 된다. 새롭게 팀에 합류한 봄날의 햇살 같은 동료 덕분에 기운을 내던 날도 있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 것 같은 동생이 반려자를 맞았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가족이 한 명 더 생겨 신기했다. 동생의 앞날이 오르막길이라 하더라도 같이 밀어줄 믿음직한 사람이 생겨 안심이 된다. 풀마라톤을 완주했고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 베토벤 소나타 12번을 맹렬하게 연습 중인데 올해 연말에는 학원에서 하는 소모임 연주회 참여 기회도 얻길 바란다.
올 해 역시 의외로 잘 살기를 내년의 내가 잘 회고 할 수있도록 25년의 나에게 부탁한다. 시봉이가 한창 일본어에 빠져 있어 일본어로도 말한다. 요로시쿠 요네가이시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