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랑 심은하 진짜 왔어.
어디?
거기 사진관 있는데 앞에.
정말.
한석규와 심은하가 학교 근처에서 영화를 찍을 거란 소문이 있었지만
진짜 내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학교 전체가 들썩거리는 기분.
영화 구경 간다고 야자 빼먹고 도망가면 알지? 라고
학년주임 선생님이 30cm 자로 손바닥을 탁탁 치면서 겁을 주셨지만
용감한 친구들은 교복 밑에 체육복을 입은 채로 달려나가고.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듯한
나와 내 친구 유진이는 산울림 노래를 들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친구들이 돌아와서 심은하를 아주 아주 먼 발치에서 본 이야기를
(아마도 스탭 아저씨들에게 제지를 당했던 듯하나)
의기양양하게 해 줄 때는 단어 하나 놓칠새라 숨죽이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석규는 잘 생겼어?
싸인 해 줬어?
심은하는 진짜 이뻐?
친구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고
선생님들이 시끄럽다며 떠들지 말라고 소리 지르셨던 기억이.
모두들 책에 눈을 고정시켰지만 키드득거리고.
졸업 후 처음 학교에 갔다.
더듬더듬 기억을 살려서, 통학하던 거리와 H.O.T 젝스키스 엽서들로 장식했던 문방구.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 '잡탕'을 먹었던 분식점을 돌아보고- 내가 가던 곳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몇 백년은 족히 된 나무도 처량해 보이고
위풍당당하던 정문은 아예 막혀 있고, 후문이 정문 역할을 대신 하고 있으며
아이들을 등교시간마다 유혹했던 문방구 두 곳은 여전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지만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수업 시간 중이어서 일지도.
그리고 비가 내려서 더 그럴지도.
고 3때 머물렀던
비좁고 냄새나던 독서실은 3층짜리 어린이집으로 탈바꿈했고-
조금만 걸어가면 고층 아파트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그 곳이 궁금해졌다.
통학할 때 마다 매일 지나던 그 일본식 가옥.
빨간색의 높은 벽 사이로 보이던 잘 손질된 나무.
졸업을 하고 나면 언젠가 정식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꼭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그 집.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한 달음에 달려가 보았다.
내 기억이 아직 맞다면 거기 있을텐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라는 표지판이 대문 앞에 보였다.
그 앞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날짜에 맞춰 음악회에 열린다는 안내도 써 있었다.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문 틈으로 살짝 안을 들여다 보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서성이는데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이성당으로 오라며.
이성당이 잘 되서 기쁘다.
병원에 다녀올 때 마다 엄마는 어김없이 이성당에 들려 밀크쉐이크를 사주셨다.
훌쩍이다가 밀크쉐이크의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쳤던 것 같다.
정민이랑 이성당에서 빵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단체로 타이타닉을 보러 갔었고, 디카프리오가 바다에 빠질 때
우리는 모두 한 목소리로 안돼를 외치며 절규했고
영화가 끝나고 빵을 와구와구 먹으며 다같이 케이트 윈슬렛을 욕했었다. (아니 도대체 왜?)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아이들 감기가 걱정되어
정말 정말 정말 안타깝게도 밀크쉐이크를 사줄 수 없었다.
이성당의 시그니처인 야채빵과 앙금빵은 오후 1시에 나온다고 하고-
맛있지 않아?
빵 맛이 그렇지. 빵 싫어하는 남편님은 시큰둥.
빵순이 주시경은 그저 좋다고 우헤헤.
맛있지? 맛있지? 외숙모 어릴 때 부터 다녔던 빵집이야.
부산스럽게 조카들에게 물어보고.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왠지 이렇게 방문을 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경비 아저씨의 차 빼라는 소리에 놀래서 쭈볏거리는 대신
반짝이는 금명함이라도 내밀면서 어깨를 쫙 펴고
몇 년도 졸업생이지 말입니다. 후후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님은 애 둘에 남편에 이 정도면 됐지 라며.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핸들을 잡고.
아 - 네. 그렇죠. 자족을 모르는 녀자라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18년 전의 나에게 조금 미안해 지네요.
오늘 밤.
18년 전의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님 사진관 앞에서 너무 정색한거 아닙니까.
맨날 지나가던 그 집 앞.
매우 낯설었다.
야채 빵 대신 동생에게 줄 소세지 빵을 넣어온 봉투.
빵 사진 찍는 걸 깜빡-
옛날에는 이런 쇼핑백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