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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함께

난쿠루나이사 오키나와

by 와락 2015.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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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망스의 말에 따르면

데제생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데제생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 비행 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알랭드 보통 < 여행의 기술 >



남편이 몇 해 전부터 오키나와 노래를 불렀지만

제주랑 다를게 머냐고 콧방귀를 뀌다가 베트남 다낭쪽 예약이 뜻대로 되지 않아

급하게 오키나와로 가게 되었다.

여행생활자도 아닌데

의도치 않게 여행을 생활처럼 하고 온 나로서는

오키나와는 제주의 장마철 태풍 오는 여름날의 한 때와 다를 바 없고

난생 처음 급체를 하여 '구토증세'를 보였던 주시경은 누구보다 오키나와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

해외로 여행을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매번 여행지에서 시름시름 앓아누워 몸관리 잘 해 놓으라고 잔소리 듣던 나는 말짱했는데

나의 피를 이어 받은 주시경이 아프자 남편은 말 그대로 멘붕이었다.

그 와중에도 부지런히 아침마다 조깅도 하고 트로피컬 비치인가도 보고 왔다는. 내 남편이지만 님좀 짱인듯.

유일하게 언제 어디서나 즐거운 우리 둘째만이

오키나와를 아릅다고 행복한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키나와 방언으로 난쿠루나이사(なんくるないさ)'라는 말이 있다는데(어떻게든 잘 될거야)

난쿠루나이사 둘째라 불러줘야 할 듯 하다.

언니는 아파서 끙끙거리는데 천진난만한 얼굴 '언니 많이 아파?' 하고 물어보고, 경이 빽 소리지르면

어쩔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 풀 죽은 얼굴로 내게 와서는 귓속말로 아까 산 캔디

하나 더 주면 안되냐고. 언니는 아파서 못먹지만 자기는 힘이 하나도 없어서 한 개 더먹어야 할 것 같다고.

돌고래쇼도 즐겁게 관람하고, 좁디 좁은 비즈니스 호텔에서 어쩔수 없이 틀어 놓은 TV 앞에서 넋이 빠져서는

엄마 호빵맨이 일본말 하는데?(여긴 일본이란다) 깔깔 거리고

제주로 치면 롯데마트 같은 나하시 메인플레이스 옷가게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신나게 로보트 춤을 추고.

둘째날 까지는 동생과 함께 설레여 했는데

셋째날 새벽부터 구토를 하더니 이틀 간 지옥을 맛본 시경이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본인이 아프지만 않았더면 더 즐거웠을 텐데라며 계속 아쉬워 했다.

경이의 아쉬움이 진하게 전해져서 '엄마도 그래' 라고 끄덕여 줄 수 밖에 없어 그게 더 안타까웠지만.

생각지도 못한 경이의 급체로 남편과 나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하하호호 거려도 부족한 여행지에서 서로 티격대다가도 급화해하고.

타국에서 유일한 육아동료이므로 좀 짜증이 나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 줄 수 밖에.

4박 5일의 여행이었는데

태풍 9호 찬홈으로(평생 네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비행기가 하루 결항 되어 정말 원치 않게

나하시 비즈니스 호텔에 하루 더 숙박을 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줄 때 남편은 정신이 혼미했던지

여보. 비행기가 결항된대. 내일 모레 뜬다는데? 큭큭거리고.

덩달아 정신줄을 놓을 뻔 했지만, 경이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일어나질 못해

병원에 가니 마니 고민하다가 일본어 번역기를 돌려 나하시 약국에서 다시 약을 지어오고.

천만 다행히 그 약을 먹고 경이는 나아지기 시작했다.

4시에 떠난다던 비행기가 9시로 연기되어

난민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나하공항에서 10시간을 대기하며

경의 온갖 짜증을 온몸으로 스펀지 처럼 흡수하고

오키나와 예약을 마지막까지 반대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스스로를 원망하며 보냈던

꽉 채운 5박 6일의 오키나와 대장정.

다녀와서 오키나와를 검색하니

아름다운 곳이 많았다. (고레와 난다요!!)

드라마 명소나 유명 소바집은 못가봤지만

메인 플레이스의 식품관 23번째 라인에 흰 죽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 안되겠지(먼 산을 바라보며)

츄라우미 수족관에도 간호사 선생님이 있다는 것도(물론 아주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전혀 위안 삼을 것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위안을 삼아야 될 것 같기에. (혼토니 다이죠부데스)

처음 맛보는 기내식 맛있게도 냠냠.



나하 공항에 내리니 숨이 막힐듯한 후텁지근한 날씨.




더 비치타워 리조트 숙소 도착. 남편이 체크인 하는 동안 아이들과 기념품 구경하고.



유명하다는 구루메스시에서 초밥도 먹고


블루씰 아이스크림도 맛보고




오션뷰가 아니라고 투덜거림도 잠시

밤이 깊어질 수록 아메리칸빌리지의 대관람차는 더욱 번쩍이고

이를 본 주자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첫째날 미션을 완벽히 수행한

우리 부부는 흡족한 얼굴로 오리온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아이들이 이토록 좋아할 줄이야.

기특한 녀석들.후후후. 왜 진작 여행을 안다녔지. 이제 자주 다니자며

감자 칩을 서로 정답게 권하며 다음 날은 오늘보다 더욱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설레여 하며 잠을 청했다.




조식 먹으러 가기 전 원숭이와 거북이가 아이들 손님을 반기고 있다.

동물원까지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아이들을 위한 조식뷔페 코너가 있는데, 흰죽, 튀김, 삶은 야채와 콩 등이 있다.

한국인도 많이 온다는 그 곳에 김범수 콘서트 티셔츠를 입고 당당히 활보하는 남편님.



둘째 날 점심은 이온몰에서 간단히 사서 먹기로.

회코너에서 2팩에 5백엔이라는 문구를 보자 주부정신이 발동하여 구매함.

한치 처럼 보였는데, 간장에 찍어 날름 날름 주시성이 잘 먹었다는.

블로그에서 사람들이 맛있다고 강추하던 타코야끼는 생각보다 별로여서 실망함.

제주도에서도 먹었던 떡볶이도 서울과 비교하면 그저 그랬으니까(머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어쩜 빵도 이리 귀엽게 만드는지, 귀여워서 한 컷.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팅크팅크. 오키나와 여자들 키가 작고 얼굴이 예쁘다던데

정말 이 삼인조를 보니 고개가 끄덕거려짐.



식사를 하며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라, 오키나와 지역음식을 시켰는데

맛은 잘 모르겠다. 지역음식을 먹어 본 것에 의의를 두기로.



아이들과 공연을 보고 나오며 찰칵.

이때만 해도 시경 컨디션이 괜찮았다. 여행이란 좋구나를 느꼈던 찰나와도 같은 순간.





우리가 렌트했던 도요타 차.



차창 밖으로 보이던 오키나와.

제주도 조천 지나서 구좌쪽으로 가던 길과 비슷한 느낌.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고래상어'를 만나고.

우리가 앉았던 수족관 레스토랑 자리가 예능프로그램에서 추사랑이

앉았던 곳이었다고 남편은 의기양양해 했지만.

경은 속이 울렁거리다며 엄마와 아빠의 인내심을 계속 테스트 하던 중.

오직 우리 둘째만이 고래 상어를 만나서 너무 기쁘다며

진심으로 좋아해 줘서 마지막 힘을 내어 돌고래를 만나러 가기로 함.




가족 모두가 기대했던 돌고래쇼는

한 낮 찜통 더위의 야외에서 모두가 헉헉거리며

박수 칠 힘도 없이 허망하게 끝이 났다는.




쾌적했던 라구나 호텔에는 다 저녁에 들어와서 아쉽기만 하고.


우리가 머물렀던 객실에서는 야구장이 보였다.

힘든 하루여서인지 야경을 보니 울컥.


수족관 간호사님 도움으로 드럭스토어에서 산 약을 먹고

이 날 저녁에는 좀 나아진 듯 하였으나.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새벽 토하고.



마지막날은 나하시내에서 모노레일도 타고, 아울렛과 쇼핑몰 등을 다닐 계획이라

가성비가 높은 비즈니스 호텔로 예약을 했건만


하루 종일 경이가 아파서 방 안에서만 있었다는.

죽만 겨우 먹는 터라 좋아하는 캔디도 동생과 갯수가 몇 개인지 세어만 보고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했다는.



아픈 와중에도 일본어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경선생.


태풍으로 비행기 결항 소식이 전해지고

시경이가 도저히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일본어 번역기와 영어

바디랭귀지를 통해 어렵게 이온몰 드럭스토어에서 약을 구하고.

다행히 저 약을 먹고서는 경이가 점점 나아지기 시작.



다음 날 아침.

밖에 나가서 식사 생각은 못하므로

또 이온몰에 가서 밥이며 우메보시, 나또, 단무지 등을 사와 먹고.



흰 죽을 어떻게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마트에 팔고 있다.

발견한 순간 얼마나 감사하던지. 아리가또




경선생 회복 기념으로 이온몰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

(그렇다. 우리는 이틀 동안 이온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날을 기념하며.

내일이면 한국에 가니까. 토이저러스에서 구매한 토끼인형과 엘사안나와 함께

창문도 열리지 않은 답답한 비즈니스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아무렴. 내가 나하시에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다음 날 아침. 풍속을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가게가 문을 닫을 정도는 아닌 듯 한데

이 기시감은 뭔가. 나 정말 오키나와 맞음? 여기 제주시 아니수꽝?


어렵게 공항에 도착하여 엔다(A&W) 버거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태풍을 뚫고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이동함.

루트비어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맛이라고나 할까.

리필가능하던데 한 잔으로 충분한 맛.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저녁도 굶은 채 10시간 가까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시경은 결국 잠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고생한 우리 큰 딸.





노오란 위액까지 토하는 경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집에서 한가로이 선풍기 앞에 앉아 오키나와 여행 블로그와 여행책자를

보는 게 훨씬 나았겠다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 처럼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며 지냈던 시간도 없었다.

물론 그 '집중'이란 것이 체력적으로도 매우 힘들었고

한계에 가까운 인내심을 요하는 것이어서 금번 육아TF멤버들은

인센티브를 받아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망각'의 힘을 빌려 힘들었던 것 조차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우리 집에서 당분간 '오키나와'는 금칙어이다.

둘째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