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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12월, 낮술, 와인, 그리고 4차

by 와락 2021. 12. 5.

 

일 년 여 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코로나가 아니어도 자주 만나진 못했을 듯한데, 우리는 애써 코로나 탓으로 돌린다.

20대에는 2주에 한번 이상 못보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30대에는 3달에 한 번 정도

그러다 40대가 되니 1년에 한 번도 쉽지 않다.

 

마치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안국역 근처 계동의 한 와인바에서 오후 3시부터  낮술을 먹기로 했다. 

안국역이라... 몸과 마음이 늘 분주한 나답게 오전 9시부터 서둘러 준비를 해서 도서관에 다녀온 후 

1시에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가방에 책 한 권 넣어 장장 1시간 30분의 지하철 여행을 떠나 안국역에 도착.

이미 "낮술, 와인, 서울, 계동"  키워드에 반응한 정지는 일찌감치 경기도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발, 동네를 구경하고 있던 모양이다. 

겨우 지갑 하나 넣을 만한 가방에 책 한 권을 넣고 그 사이 빵집에 들러 빵도 사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경기도민이 된 게 못내 아쉬운 서울 여자 정지는 한껏 신이 났다. 

 

 

예전 인사동 기억은 어디로

인스타에서 자주 볼 법한 핫플들이 즐비했다. 

우리가 만나려던 와인바에 오픈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여 서성거리니

훈남 사장님이 정시에 오라고 말투는 친절하게, 태도는 사뭇 냉정하게 알려준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였으면 '한 10분 먼저 좀 들어가 물 한잔 먹고 있음 안될까요'라고 한 마디 해볼까 했는데... 철저한 사장님이다. 

한 바퀴 돌다 추워서 그 옆 빵집에 마치 일행이 있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들어가 빵도 구경 하고 화장실도 다녀왔는데도 시간이 남아

문 앞에서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는데, 빵집 문 앞의 벤치에서는 그 추운 날에도 덜덜 떨며 커피와 빵을 바깥에서 먹고 있어 놀라웠다. 

 

 

친구들이 도착해서 화이트 와인부터 시작. 늘 그렇듯 주문은 그녀들의 몫이다. 

오양은 번쩍거리는 크리스마스 스타일의 네일케어를 선보였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뿌염도 했다고 어깨를 으쓱해한다. 

이에 질세라 나도 지난주 새치 염색과  머리손질을 했다고 응답해 주었다. 정지는 오양의 반짝이는 손톱을 보고 칭찬뱃지를 달아주듯 크게 끄덕여준다.

 

화이트 와인을 홀짝 거리며

사는 이야기, 회사 이야기, 그러다 안주가 맛있네, 다시 엄마 이야기,

십 수년 얼굴은 제대로 못 봤으나 자세히는 알고 있는 주변 지인의 안부까지 한 바퀴 돌다 보면

분명 우리는 일 년 전에 만났었는데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친 느낌이랄까.

각자의 세계에서 잘 살고 있다가도, 셋이 모이게 되면 멈춰진 악기를 작동시키는 것 같다.

 

허투루 보낸 시간은 없다고.

단 한 단어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쌓인 시간들 때문이겠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서인지 

대화 지분이 전에 비해 높아진 정지는 와인을 드링킹 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이야기했다. 

중2도 갱년기도 아니지만,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현재 모습과의 간극, 그리고 그 부분이 자식까지 투영되면서 겪고 있는 갈등. 

나는 자격지심이 불러온 참사와 조직에서의 갈등, 문제 해결까지. 

오양은 다가올 스톡옵션 행사에 대한 기대와 성장에 대한 결핍. 그리고 미해결 된 가족 이슈.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고민이지만 주제는 비슷했고, 이 역시 우리가 40대에 겪는 성장통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우리가 꾸준히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식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는 것인데(과연 그것이 러닝이란 말입니까? 질문을 받게 될 지라도)

이 또한 해내고 있는 우리가 대견스럽다.

 

 

오양의 핸드폰에는 

오래전부터 찍은 사진들이 모여 있는데...

이 블로그 어딘가에 기록된 만남의 사진도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지금보다는 젊어 보여 신기하고, 그날의 기억들이 소환되어 재미있다.

마흔을 넘어 오십까지 잘 지내서 십 년 후에 되돌아봤을 때 별거 아닌, 참 그때 기운도 좋았다 라고 즐겁게 기억되길 바란다. 

 

 

 

 

3시에 만나 화이트 와인으로 시작했다. 
인물사진으로 셋팅하고 주위를 블러 처리하면  음식사진이 더 돋보인다고 한다지만 구도의 문제겠지요..
좋은 곳이었다...

 

 

2차도 와인을 먹었고...

 

 

3차는 하이볼과 맥주를
실물과 너무 다름... 정지는 질색을 하지만 웃기기만 하다.

 

3차까지 아름다웠으나, 아쉬워서 4차. 결국 다 마시지도 못하고 내년 4월 흐트러진 벚꽃을 보며 대낮 술자리를 기약하며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