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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21년 12월 31일

by 와락 2022. 1. 7.


사실을 말하자면

네가 바쁜 만큼 세계는 흔들리고, 세계가 불안해 너는 또 바쁠 것이므로

바쁨의 명분은 영원히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바쁨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바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 얼마나 당당한 일인가

바쁘기 위해서는 얼마나 바쁘게 애써야 하는가 얼마나 무섭게 애써야 하는가

바쁘다는 것은 고독한 일 그러나 너는 다행히 울 줄 모른다 

바쁜 너는 밤 숲의 쏙독새 울음을 들어서는 안된다 

봄 산의 애기똥풀꽃을 보아서는 안된다

늙은 어머니의 가늘게 코 고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된다

비애와 평화와 휴식은 바쁜 영혼을 좀먹는 병균과 같으므로 

먹어치우기 위해 밥은 있고 쉬어치우기 위해 숨은 있을 뿐 

 

부시, 바쁜 / 김사인 시집 중 

 

 

 

2021년이란 숫자가 익숙해지려 하니 해가 바뀌었다. 

2022라니. 이 얼마나 낯선 숫자인가. 원더키드가 자꾸 떠오르는... 

연말 조용히 카페에 가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는데, 마지막 날에도 성난 사람처럼 바쁘게 보내며 감사할 겨를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블로그에 2012년도에 쓴 글을 보니 #꼰대는 되지 말자#고 태그가 달려 있던데...

다짐과 무색하게 9년후의 나는 여전히 종종거리며 회사에서 제일가는 꼰대가 되어 있다. 

미안하다 9년 전의 나님이여.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려... 착잡...

 

 

어머니와 물리적인 독립을 하고 나서 이후 느꼈던 걸까. 

나를 존중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김사인 시인의 말처럼 바쁘게 무섭게 애써서 보내느라

나의 발가락과 뒤꿈치와 종아리에게도 감사함을 모르고 

가족,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 맞추어 살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는 잘 물어보지 않았다.

나와 잘 지내기 위해 베이킹도 시도해 보고, 다른 취미 활동이 뭐가 있을지 기웃거려 보았다.

재테크 책은 열심히 사모으는 중이고, 미국 주식 계좌도 만들어 소액으로 투자도 해보았다. 

청소년상담사 수련도 여름에 온라인으로 받고, 연말에는 자격증도 취득했다.

 

회사에서는 새로운 상품도 출시하고, 제휴처도 확대 중이나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이 존재... 

무엇보다 리더십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시기다(실상 내 마음은 격동의 시간들을 보냈..)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판교의 운중천까지 넘쳐흘러 절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지.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된 건은 감사할 일이다. 

문제를 어렵게 생각했고, 풀어가는 해결책을 남에게 의존하려 했으며, 그동안 쌓은 자신의 '짬바'를 확신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기를, 지지해 주길 바랐던 것. 

그 결과는 혹독했고, 제대로 펀치를 맞은 기분이랄까.

덕분에 연말에 알 수 없는 두드러기 증세와 피로감으로 수액을 맞으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경선생의 21년 키워드는 NCT와 Percy Jackson, Harry Potter이다. 

초여름 한국에 검진하러 들어온 시누와 조카 덕분에 방탄을 버리고 바로 NCT의 세계로 환승했다.

방 문을 닫고 NCT의 노래를 들으며 조카가 미국에서 보내주는 NCT 짤방과 이미지들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겨울방학 무렵부터 학기 초까지는 퍼시 잭슨에 빠져 올림푸스 신화까지 섭렵하다가 여름 이후 드디어 해리포터에 빠졌다.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은데, 다른 책을 읽어도 시큰둥하다. 

덕분에 영어 실력은 더욱 좋아져서 얼마 전 대형학원 테스트까지 시도해 보았다. 

학원 선생님의 영업 멘트겠지만, 흡족할 만한 피드백을 받고 겨울방학부터 주 2회 영어학원을 다녀보기로 했다. 

학교에서 진로탐색 수업에서는 반려동물행동치료사가 되고 싶다고 발표하고, 관련 과정이 영국에 있다는 것을 엄마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동물학과와 관련 과정이 있다는 것을 함께 탐색하고 나서 그 학교에 가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되는지 

진로를 설계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뿌듯하다.

동시에 본인은 엄마랑 잘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선을 긋기도 하고, 자신은 혼자 있는 게 편하니 그냥 내버려 달라고도 이야기한다. 

사춘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뭐 나라고 늘 맘에 맞는 건 아니지만(끄응)

부모랑 적당한 갈등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이 잘 크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니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 중이다. 

박혜란 교수님 말씀을 떠올려라. 자식은 뭐다? 20년 손님. 

 

 

시봉이의 한 해 키워드는 단짝이 필요해, 블로그 시작 정도가 아닐까 싶다. 

혼자가 편한 경선생과 달리, 관계중심적인 우리 시봉이는 또래 관계 중 '단짝 맺기'에 최선을 다한 한 해였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화해하고, 무수히 반복하며 울고 웃고, 희로애락을 매일 느끼고 있는 시봉이에게 

앵무새를 키우면서 블로그를 권했다. 

몰아치는 감정을 글쓰기로 정화하길 바라는 엄마의 기대와 달리 블로그 안에서도 이웃블로그님들과 관계 맺기에 열심이다.

답글도 달고 이웃도 하고. 그래도 바이올린도 꾸준히 레슨을 받으며 연말에는 연주회도 했었다.

꾸준히 연습까지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것은 부모의 기대일 뿐, 시봉은 시봉의 속도대로 하고 있다. 

 

 

남편에게 21년 '농구'라는 키워드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그리고 그에게 과연 '농구'는 어떤 의미일까. 
매일 저녁 집에 돌아와 아이들이 푼 수학 문제집을 채점하고, 거실을 청소기로 돌리고,

바닥에 말라 붙은 앵무새 똥을 닦은 후

NBA나 KBL의 경기 영상을 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 그의 루틴이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수원에 있는 농구 경기장까지 가서 경기를 보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는 당근에서 허훈인지 허웅인지(허재의 아들인 건 나도 안다) 사인이 있는 경기 티셔츠를 사 와서 한껏 자랑하기도 했다. 

신혼 초부터 격렬하게 회사 다니기를 힘들어하고 핏속에 한량의 유전자가 있는 듯 행동하지만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요가매트에서 홈트도 하고 바나나 한 개를 아침 식사로 대체하고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멀고 먼 지하철 여행을 떠나 돌아온다. 

머리에 눈이라도 소복이 쌓인 것처럼 흰머리는 늘어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서른두 살의 남편이 코를 찡긋거리고 인사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리고 앵무새 바다

연초 고양이라도 키우려 알아보면서 병원 알레르기 검사까지 받아봤는데 시봉이의 알레르기 지수가 높아

아쉽게도 고양이가 아닌 대안으로 앵무새를 키우게 되었다. 경선생은 끝까지 강아지를 원했으나,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3월에 조류전문샵에 가서 데려왔는데, 지금은 당당히 가족의 일원으로 지내는 중이다. 

할 수 있는 말은 '뽀뽀와 바다야' 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퇴근하고 오면 머리와 어깨에 올라와 마치 인사하는 것 마냥 아는 체를 하고

밤이 깊어지면 새장에 들어가(주로 넣어주지만) 조용하게 지내고...

식사할 때마다 식탁 근처에 올라와 뭐라고 하면 퍼드득 날아가기도 하고. 

지난 경주 여행 때 잠시 조류 전문점에 사흘 정도 맡겼는데 다녀와서 아이가 핼쑥해지고 몸에 진드기도 생긴 것 같아 

당분간 여행은 못 가겠다 싶었다.

똥은 아이들이 닦을 거라 다짐받고 데려왔는데  정작 성실한 남편이 격주 걸러 새장을 청소하고 있다. 

까만 눈동자를 졸리면 가늘게 뜨기도 하는데, 그 조그만 얼굴에 표정이 있는 것 같아 너무 귀엽다. 

아이들도 작년 한 해 가장 잘한 일이 '바다'가 가족이 된 것이라고 한다. 

 

 

 

 

2022년

올해도 나의 세계는 흔들릴 것이고

또 불안한 만큼 나는 바쁘게 지낼 것 같다. 

그럼에도 

먹어치우기 위한 밥이 아니라, 기쁘게 맛있게 나누며 식사하고

쉬어치우기 위한 숨이 아니라, 어깨를 펴고 심호흡도 해 가며

성난 눈에 힘을 빼고

바쁨의 명분을 찾기보다 평화를 비면서  

마흔두 살을 보내고 싶다. 아니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