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생활 중 뜨겁다고 표현할 수 있는 시기는
이십 대 중반, 어머니가 아프시던 그 무렵이다.
성당에 다니던 그 시절에도
가끔 새벽에 묵주기도는 해 본 적이 있지만
새벽 미사를 나가거나 밤을 새워 기도해 본 경험은 없었는데
올 해는 특새(특별 새벽부흥회)를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개신교를 다니면서 처음이다.
3년간 나름 열심히(몸으로는 열심히, 마음으로는 다른 이들을 정죄하며) 봉사한 이전 교회를 떠나
코로나 기간 동안에는 분당 우리 교회 이찬수 목사님 말씀을 온라인으로 듣고
29개 교구로 흩어진 교회 중 집 근처에 가장 가까운 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어쩌면 성당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바로 집 앞의 성당으로, 하얀 미사포를 쓰고, 조용히 온전히 미사에 집중해서 신부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던 그 시기로.
어쩌면 나에게는 가장 순수하던 오로지 어머니의 안위와 20대 다운 고민을 하던 그 시절.
미사에 가면 영적인 허기가 채워지던 그때가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옮긴 교회의 목사님 말씀도 좋고
목사님이 언급하신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다시 읽으니
새벽 예배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작정을 하고 4시 50분에 일어나
떡진 머리를 손으로 빗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주섬 주섬 옷을 챙겨입고 교회에 가니
그 새벽에 주차봉사를 하시는 어르신들이 계셨다.
5시 15분쯤 교회에 도착해서 차마 예배당 문은 열지 못하고 아이들이 있는 자모실에 들어갔는데
아기띠를 하고 온 자매, 두 돌도 안된 아가를 데리고 온 부부를 보고 너무 놀라웠다.
나의 30대를 돌아보면, 이 시간에 새벽예배는 생각도 못했을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구나. 그 다음날은 좀 더 일찍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5시쯤 예배당에 들어서니
4살 5살 아이들 손을 잡고 온 가정도 꽤 되었다.
집에서 자고 있는 주자매가 생각나면서... 부모가 보여주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워크숍 기간이라 이틀 정도는 참석하지 못하고 금요일에는 김밥 봉사가 있어 남편과 같이 나갔다.
남편은 다락방 찬양이 있어 3시 50분까지 오라는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나의 꾸물거림으로 4시 40분쯤
허겁지겁 뒤늦게 합류했는데 이른 시간의 뜨거운 열기와 꼬맹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예배당에 온 것이 인상 깊었던지
다음 날은 주자매를 데리고 오자며 바쁘게 회사에 출근했다.
부흥회 마지막 날은 토요일이라 주자매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흔들림 없이 자는(시몬스 침대인가) 경선생은 집에 두고
시봉이만 데리고 참석했다. 새벽 4시 30분에 아이를 깨워 교회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나중에 우리 시봉이는 이 시간을 어찌 기억하게 될지 궁금하다.
특새 주제는 '붙좇는 은혜, 덮으신 사랑'이었다.
룻기 강해였는데, 나오미와 룻기, 보아스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게 되고 감화받는 시간이었다.
룻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헤세드였는데
헤세드는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다하는 사랑이며,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한다.
붙좇다라는 말은 "존경하거나 섬겨 따르다."라는 뜻인데(네이버 사전) 목사님은 언약적인 충성, 절대 존재가치를 부여하는
관계라 하셨다.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는 헌신. 강한 자가 오히려 약한 자를 도와주고 충성하는 것.
나오미에 대한 룻의 헌신. 이게 바로 헤세드라고 한다.
5리를 가자하면 5리를 가고 나서 '난 여기까지' 라며 선을 긋고 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교회에서도 회사에서도 비슷했는데, 그러면서도 스트레스는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고 별 수 있나.
10년간 어머니를 모시고, 남편이 죽자 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가란 말에 바로 응답한 오르바처럼,
내 기업에는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고 보아스에게 미룬 아무개처럼.
상식적으로 합리적인 그들의 선택은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무모하고 헌신적인 룻기는 훗날 다윗의 조상,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공동체의 기도는 결국 응답 받았다.
그분을 향해 붙좇는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누릴 수 있을지 합리화에 빠진 나에게 물어본다.
어쩌면 내 옆에는 스크루테이프가 보낸 웜우드가 바짝 붙좇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저 자매의 갈등을 자극하라고. 적당히 교회에 출석하는 태도를 가족을 향한 노력이라 생각하게 만들라.
그리고 교회 사람들을 마음 속 깊이 손가락질 하며 판단하게 하라고.
늘 계획을 짜게 하고 실행은 내일부터 하게 만들며, 염려와 불안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도록.
뭔가 벌어지면 하나님을 찾기 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라며 누군가를 바로 탓하게끔-
그러면서 본인은 진정 신실한 믿음을 가진 이처럼 착각하게 만들라.
웜우드가 있다면
나는 완벽하게 그의 계획대로 된 것 같다.
아뿔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