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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이다.
사실, 난 여행기는 그닥 즐겨 읽지 않는데. 그의 다른 여행기들도 읽지 않았고.
'시칠리아'가 주는 묘한 기대감에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그가 상상했던 대로,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잔잔한 지중해, 언덕 위의 올리브 나무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마흔의 나이에 아쉬울 것이 없는 환경-
잘 나가는 소설가이자 국립예술대학교 교수,라디오 문화프로그램 진행자- 누구나 부러워 할 위치였지만,
그것이 자유로운 영혼인 그를 숨막히게 했다고 한다.
"저주의 대가로 월급과 연금을 보장받고 꽤 쏠쏠한 출연료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었다. 쉬익쉬익,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모든 걸 훌훌 털고 아내와 시칠리아로 향하는 그를 보며
그저 침을 꿀꺽 삼키기만 했다. 부.러.워.서
여행기의 내용은 (기대보다는) 큰 감흥은 주지 못했다.
누군가의 블로그를 무심하게 스크롤을 쓱쓱 내려가며 읽어내려 가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더니 시칠리아 섬에서의 2달 여간 여행이 끝나 있었다.
우리도 이렇게 모든 걸 버리고 갈 수 있을까?
그가 말한 대로 스트리밍 라이프, 실현할 수 있을까?
혼잣말을 빙자해 남편에게 들으란 듯 소리내어 말하니,
본업이 작가이니
그는 주변을 정리하고 떠난 여행에서도 글을 쓰고,책을 내고, 인세를 받고
또 여행을 떠날 수도 있는거라고 남편은 옆에서 딴지 걸 듯 하더니, 위뭉스럽게 말한다.
네오가 태어나면 캐나다 함 가자구. 우리 셋이 (정말 갈 수 있을까?)
어쨌거나.
마지막 후기에 실은 그의 사진.
하얀 치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활짝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원하는 대로, 자유로운 유목민의 삶을 택한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낼 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기대하는 것 밖에는.
# 인상깊은 구절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된다.
p26
어느새 나는 그렇게 돼 있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어느새' 그렇게 돼 있었다.
이런 '어느새'에는 어떤 값싼 자기 도취가 있고 그 안에 오래 머물고 싶은 달콤한 유혹이 있다.
p27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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