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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결혼 8주년

by 와락 2016. 3. 4.


"먼저 전화를 드리는게 예의인줄은 아나 

제가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적응을 못하고 심한 목감기에 걸린 상태라

전화드리면 흉칙한 목소리에 놀라실거 같아서 이렇게 메일로 대신합니다."



소개팅 전

메일로 먼저 양해를 구하고  만날 날짜와 장소를 물었던 '그'와

만 8년을 함께 살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을 친정엄마에게 맡긴 후 2박 정도 강원도라도 다녀오고 싶었지만

주중에도 야근이다 뭐다 해서 늦기 일쑤라 차마 말은 못꺼내고

작년 처럼 호텔에서 하루 쉬기로.

그래 하루가 어딘가. 아직도 주시성의 발차기에 7시간 이상 꿀잠도 못자는데

쾌적하고 아늑한 곳에서 온전히 쉴 수 있을것이란 기대감으로 2월을 버텼다.



그저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라고 말은 그렇게 해 놓고)

호텔사이트를 검색해 보면서 이번에는 다른 곳을 어디 한번.... 조회 후 가격에 움찔.

작년에 순전히 나의 실수로 연금보험료를 내지 않아 밀린 보험료를 체납하느라

면목 없는 나는 강력하게 여기에 가자. 말도 못하고 

'광화문에 포시즌스 호텔이 생겼다. 최근 기사를 보니 어쩌고 . 포시즌스 호텔 사장은

원래 건축가였대. 알고보면 호텔에 큰 수건은 그가 최초로 시도했다던데...." 

끊임없이 중얼거렸으나 이미 해당 키워드는 그의 뇌에서 거부 처리. 



여하튼 

하루 쉬는 것에 의의를 두고

대신 주차나 여러 가지 문제로 그 동안 가보지 못했던

핫플레이스 '연남동'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번에도 초밥. 언제나 먹어도 맛있는 초밥.



식사를 하고 

그랜드힐튼호텔로 출발.

체크인 시간보다 너무 이르게 가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서프라이징 이벤트를 준비 중이었다. 

연애 당시에도 청혼할 때를 제외하고 이벤트는 전혀 없었기에.

사전 예고/계획 없이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결혼 후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정말 예상외였다. 


내 손을 잡고 스파시설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서 '설마?' 싶었으나 

스파와 맛사지 코스가 예약 되어 있었다는.  오오. 뤼얼리?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8년만 살아서는 부족한가 보다. 


어리둥절하며 호사스럽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앞으로도 매년 '기념일'만큼은 알차게 지내야 겠다고 (혼자만의) 다짐을...


남편은 낮잠을

나는 푹신한 침대에 기대어 여유롭게 책을

일상적이지만 아이들의 방해 없이 보내는 소중한 시간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조식을 먹고 있었다. 



아쉽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고

내년에도 기념일은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므로 

한숨을 길게 내쉬며 집으로.



두 아이를 낳았고, 두 번의 큰 상을 치렀다. 

두 해 동안 제주/서울을 주말마다 오며 가며 전쟁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고

내년이면 우리는 학부모가 된다.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헤쳐왔기에 남편에 대한 감정은 전보다 더욱 깊어졌다. 

3년간만 유지된다는 이성간의 '사랑'을 넘어선 동지애? 라고나 해야 할까.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남편. 

그로 인해  아줌마로서의 정체성만 갖는 것이 아니라(외면상 그러하지만) 

여자, 회사원, 아이 엄마, 며느리, 딸 더불어 삶의 의미를 찾고 조직 또는 

사회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노오력 중이지만)

때론 매우 얄밉지만 감사하기도-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내가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높은 로열티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본인이 가진 마성의 매력으로 내가 압도당했다고 여기고 있지만

기념일이기 때문에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진실은 언제나 밝혀질 테니 말이다. 




너무 일찍 연남동에 도착하여 2월 마지막날 꽃샘추위에 떨며

차안에서 대기하다가 스시 이가의 첫 번째 손님이 되었다. 

점심 정식 12,000원. 가격 대비 훌륭했다는. 




(주자매 참견과 방해 없이) 우아하게 티타임을 했던 아름다운 시간.

물론, 쿠키와 초콜릿을 보니 아이들 부터 떠올랐지만. 



푹신한 침대에서, 베개 2개를 겹쳐 놓고는 편하게 기대어 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는.

호텔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와 달리, 책 속 주인공들은 열악한 수용소에서

고군분투 중이였다. 





그랜드힐튼 해피아워. 전보다 음식 가짓수가 좀 줄어들었다고 하던데 

공짜 저녁이라며 그저 우리는 만족, 만족. 

싸구려 양주 뿐이라고 남편은 볼멘소리를 했지만.

옆테이블의 여자분들은 오렌지주스로 스크류드라이버 칵테일을 만들던데

도전해 보려다가 다음 날 숙취가 두려워 그저 와인만 홀짝. 




찍다 보니 죄다 먹는 사진 뿐이네. 

그냥 주자매의 음식을 챙기지 않고 남편과 오로지 내 입으로 들어갈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먹을 때보다 과식을 하게 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