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심이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중략)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밝은 밤 / 최은영
주일 오후, 1시부터 7시가 다 되는 오후 시간 내내 교회 영상 편집으로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 중
이런저런 요구로 인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모습을 보자 남편이 지나가며 한 마디 한다.
자신을 갉아 먹지 말라고, 칭찬받으려 하는 게 아니냐며. 속에서 울화통이 터진다.
교회와 관련된 일에 남편이 한 마디 하면 발작 버튼이 눌러지며 노여움이 솟아나는 까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근원적인 이유는 내가 가진 '억울함'이다. 기본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은은히 깔려 있는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내가
가족을 위해 '희생'이란 고귀한 명제 앞에 성당이 아닌 개신교 교회를 가겠다고 '선택'한 것이었다.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인 사유는 '시어머니의 권유'였으며 남편은 단 한 번도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은 것 같다(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척 쿨하게 '너의 선택' 아니었느냐며 검은 머리 외국인 느낌으로 말 할 때마다 속은 기분이 들지만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 중이다. 성당이든 교회든 종교단체는 섬김이 늘 필요하고 1인 1 봉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이전 교회에서도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과 성을 다해 임했다. 남편은 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 부분이 잘 안 되니까. 인정욕구 때문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는 나의 고리타분한 성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트위터 추천으로 마음이 따수워지는 책들 리스트 중에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 있었는데
저 문장을 읽는 중 여러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허영심이 나를 갉아 먹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잃은 것에 대한 보상, 감사함에 대한 표현을 받고 싶다.
그럼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집 앞에 있는 성당에 가지 못하는 것인가.
성당에 간다고 많이 달라질까.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전혀 납득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어디서든 만날 수 있으므로.
결국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아 늘 옅은 노여움을 느끼지만
그런 걸로 노여워함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들킬까 두려운 것은 아니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