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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끝난 사람

by 와락 2018. 1. 16.


 젊은 시절에 수재 소리를 들었든 못 들었든, 미인이었든 아니든, 일류 기업에 근무 했든 아니든 

모든 인간의 종착지는 대개가 비슷하다는 것. 종착지에 도달하기까지의 인생은 학력이나 자질 등 수많은 운등에 

영향을 받고 격차니 손득이 있었겠지만, 사회적으로 '끝난 사람'이 되고 나니 다 똑같았다. 일렬횡대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종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잘 굴러온 인생들은 오히려 '일렬횡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힘들어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를 하고 아등바등 출세를 향해 몸부림을 쳤던가. 혹시 종내에는 이렇게 

'일렬횡대'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피나게 살았을가?



                                                    우치다테 마키코  / < 끝난 사람 > 중 작가의 말 




끝난 사람. 제목이 주는 강렬함에 끌려 읽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는 베이비부머들의 강렬한 공감과 지지를 얻었고 영화사가 판권을 사서 올 여름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좋아하는 배우 히로스에 료코가 나온다고 해서 궁금하기도 하다.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와 찰랑거리는 단발 머리가 예뻐보여

머리라도 비슷하게 따라 해 보려고 사진을 가지고 가서 잘라본 적도 있었지만 난감한 디자이너의 표정대로

가져간 사진과는 매번 다른 느낌이었다. 



 새해 시작 후 인사팀에서 연락을 받았다. 

장기 휴직자 대상으로 복귀 시기를 묻고 현조직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인사팀 소속으로 배정 받을 것인지에 대해 

당사자의 의견을 묻는 것인데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사무적인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고민이 필요한 것이었다. 휴직을 낼 때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지만 막상 답을 구하는 전화를 받으니 울렁거렸다. 


 


 엘리트도 아니고 퇴사를 하더라도 다시로처럼 멋진 세단을 타고 후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갈 처지가 아닌데도

주인공의 공허함과 허탈함이 크게 와닿았다. 뜨겁고 의욕적으로 일한 다시로 같은 사람을 조직에서 여러 번 경험하며 

아등바등 살았지만 그 끝은 노력했던 것과 달랐다는 결론을 목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안에 여전히 꿈틀대는 잘난 사람, 엘리트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책을 읽으며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실감했는데(물론 이 상승욕구는 언제나 동기만 있다면 다시 부활하겠으나) 머지 않은 미래에 일렬횡대로 

만나게 될 그들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그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을 것 같지만)




 

  주인공 다시로는 지방 고등학교의 '보통반'에서 시작해 도쿄대의 법학부, 일류 은행에 입사하여 서른 아홉에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되어 어깨로 바람을 가르는 40대를 보냈다. 손에 잡힐 듯 다가온 임원 자리는 상사가 경영회의에서 밀려나면서

입사 동기에게로 넘어가고 자회사로 좌천된다. 틈틈히 본사로 돌아갈 기회를 찾아보지만 나는 끝났다 라는 좌괴감만 들고

이후 예순 셋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명제에 집착하며 퇴사를 한다. 

몸과 마음이 시들지 않은 그는 헬스클럽에 다니는 노인들과 가까이 하지 않고 여전히 '일의 세계'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 

문화센터에서 만난 구리라는 여인을 보고 새로운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그러던 어느 날 헬스클럽에서 만난 스즈키가 벤처 회사의 고문으로 영입을 제안하여 잠시 고민했다가

다시금 찾아온 일의 세계에 흠뻑 빠져 멋지게 다시 비상하는 시니어를 갈망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예상치 못한 결말이 기다리고 결국 아내 지구사와도 갈등을 겪는다. 

지구사는 40대 이후 배운 미용기술로 주택가에 숍을 내고 다시로는 시골로 돌아가 남은 인생을 보내려 한다. 




 은퇴 후 아내랑 지내는 법, 조직에서 소모되지 않고 살아 남아 취미생활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틀 마련하기 등의 

소소한 몇 가지 팁을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불순하게 남편에게 권했는데 그는 몇 장 읽다가 한 숨을 쉬며 책장을 덮었다.

은퇴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지지부진하다는 것인데(남편은 일본 소설을 질색한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

더 읽어보라고 해도 거절하면서 구리라는 여인과의 불륜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왜죠?) 

하기야 남편은 은퇴해도 매우 잘 지낼 것이기 때문에 다시로라는 인물이 별로 공감가지 않는지도. 




 다시 멋지게 비상하는 듯 보였지만  제 자리로 아니 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돌아오게 된 다시로.

품격있는 쇠퇴에 지나치게 연연하며(그 명제는 정말 아름답고 동의하지만)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지만

결국 남는 건 아내와의 불화와 없어진 노후비용이다. 나이가 들수록  '경제력'이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유지시키고 

또한 서로에게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임을 지구사를 보며 느꼈다.




스스로에게 끝이 났다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홀가분함을 느끼게 될까 아니면 아쉬움... 혹은 서운함...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려나. 

일에 흠뻑 빠져 완전히 연소된 경험을 해 봤던가. 최소한 한 두번은 있었던 듯 한데

그것으로 조직에서(지금 회사가 아니더라도) 그저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허세를 부리며 멋지게 퇴장 할 수 있을까. 

다시로의 말을 빌리면 월급쟁이는 인생 카드를 타인이 쥐고 있으므로 내가 결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나의 선택'이었다고 떠밀리듯 어디론가 배속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고민은 그때 가서 다시 하기로 한다. 필요하다면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는 허세도 부리고 말이다. 





#밑줄 그은 구절

그 사십 대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돌아보면 확실히 그렇다. 은행 안에서는 어깨로 바람을 가르며 다녔고, 

의지가 되는 대상으로 인정받고 거물 고객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온몸에서 넘쳐나는 에너지를 실감하던 시기였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새로운 하루가 오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p16



나는 끝났다. 

뜨겁게 열심히 의욕적으로 일을 한 사람일수록 허탈감과 공허함은 깊게 마련이다.  

더 이상 직장인으로서의 장래는 없다. 겨우 자회사의 사장이나 전무가 되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p21


나는 '보통반' 시절인 열다섯 때부터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사회적으로는 '엘리트'의 중심을 걸었고 늘 조명이 쏟아졌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전성기는 짧다. 한순가에 불과하다. 그 열다섯 살 부터 계속해 온 노력과 단련은 사회에서 

이런 최후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사람은 장래를 모르니까 노력을 할 수 있는 거다. 

일류 대학을 가든지 어떤 코스를 걷든지 인간이 가는 길은 큰 차이가 없다. '남는 꽃도 지는 꽃'이다. p22



나란 인간, 무엇 하나 특별히 사회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일도 없이 그저 가족이나 부양하다가 끝나 버린 하찮은 인생인가?

그러나 설사 본부 임원이 되었던들, 은행장이 되었다 한들 '떨어진 벚꽃, 남아 있는 벚꽃도 다 지는 벚꽃' 신세였을 것이다. p27



월급쟁이는 인생 카드를 타인이 쥐고 있다. 어디로 배속되느냐 하는 것도 타인이 결정하고, 

출세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타인의 손에 달려 있다. p46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부심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해...... 그때 나는 골수에 사무치게 깨달았어."

나에게는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픈 말이었다. 기업이라는 곳은 사람을 부추겨서 뼈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게 만들어 놓고 한껏 올려놨다가 나이가 들면 땅바닥으로 내치는 데다, 그런 끝에 '끝난 사람'이 무슨 수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래? 상당히 공감이 가는 말이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겪을 것은 서른한 살 때였다고 했는데 어떻게 마흔여덟까지 버텼냐?

자부심은 어떻게 된 거야?" 한껏 비꼬아서 한 말이었는데 니노미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부심은 '이 회사에서 절대 출세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졌지. 그런데 마누라가 하나 있는 아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참아달라고 해서 어찌나 사정을 하던지....."

나노미야는 직장 생활은 계속하며 프리로 복싱에 관계된 길을 찾았다. p89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니노미야에게 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 있는 한 승부는 움직이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인생은 승패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두 사람의 생활을 생각하면 니노미야가 훨씬 충실하고 즐겁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래도 '인생에 승자와 패자는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졌다. 졌어.

깨끗이 승복할 수 밖에 없었다. p92



"우리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자유롭게 살자."

희미한 불빛 아래, 예순의 차분한 얼굴이었다. 

스무네 살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타인이었던 한 여자와 인생을 함께하고 함께 늙어 왔다.  p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