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케이크와 맥주 / 서머싯 몸

by 와락 2023. 9. 16.

둘째가 최근 문학책에 빠져 있어 같이 도서관 책장에서 함께 책을 고르다 ‘케이크와 맥주’라는 제목이 흥미로워 읽게 되었다. 
출판 당시 실존한 인물을 토대로 쓰인 책이라 해서(공식적으로는 부인했으나) 논란을 일으켰다. 작중 처세술이 뛰어난 앨로이 키어라는 작가는 몸의 20년 지기 휴 월폴로 추정되는데 심지어 그는 출판을 막으려고 까지 했다고 한다. 서머싯 몸은 그를 달래기 위해 "만약 자네가 이 작품에서 자네의 모습을 보았다면 우리가 대동소이할 뿐 결국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일세"라는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에서 작가의 말처럼 내 모습도 보게 되는 것 같아 책을 읽으며 소름이 돋기도 했다. 


화자인 어센든은 소설가 에드워드 드리필드라는 작가의 전기를 집필해 달라는 동료 작가의 요청을 받는다. 어센든이 어린 시절 블랙스터블에서 드리필드 부부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센든은 고향 블랙스터블과 런던에서 드리필드 부부와 함께 지냈던 시간을 되돌아보며 회고한다. 드리필드는 젊은 시절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문단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런던에 올라와 트래퍼드 부인을 만나면서 그녀의 후원아래 대작가의 전철을 밟아간다.  결국 사랑하던 여인 로지가 떠나고 후견인인 트래퍼드 부인에게 종속되어 개성을 잃어가다 병을 얻은 이후 간호사 출신의 여인과 재혼한다. 이 책이 발간되었을 때 서머싯 몸은 여러 대상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작가의 서문에도 밝힌다. 에드워스 드리필드는 ‘토머스 하디’를 모델로 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의도가 아니었다고 공식적으로 말한다(비공식적으로는 실존한 인물을 토대로 창작에 임했다고)당시 책을 출간하고 대중의 시야 안에 머무르기 위한 인터뷰, 모임 연설, 출판사들이 광고하는 책 추천 등 홍보를 위한 여러 행사에 참여하여 상류사회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명성을 쌓는 과정 여실히 보여준다. 문단의  내막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파장을 일으키고 동시에 성공한 작가로 남기 위해서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면서도 작가로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평균 나이를 넘긴 노작가가 노년에 보편적으로 칭송받는 진짜 이유는 지식인들이 서른 살이 넘으면 글을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 읽은 책들이 화려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p144”

작중 소설가 드리필드도 일흔다섯 살이 되자 천재로 인정받고 여든 살에 영국 문단의 거장이 되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작가로서의 생존을 중요시했던 그는 자신이 말하던 대로 아흔한 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명예 훈위 칭호를 받았다. 케이크와 맥주가 쓰인 시점이 1930년 오십 대 중후반. 자신이 말한 대로 대중의 관심을 잃지 않고 노작가로 생존한 것이었다. 그의 작가 연보를 보면 고갱을 모델로 달과 6펜스 소설을 위해 타히티섬을 여행하기도 했으며, 전쟁 중 첩보 생활한 당시 경험을 소재로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여든 살에 이르러 평론집을 출판하고 작가생활을 끝낸다고 선언했다. 

술술 읽히는 내용과 달리 주인공들의 면면이 이해되지는 않았다. 특히 마지막 챕터에 다시 등장하는 로지의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소설, 문학 작품인데 이성적 판단을 하며 옳고 그른가를 재고 있는게 맞는가. 최근에 밑줄 그으면 재테크 책만 읽다보니 감이 떨어진 것인가. 현실에서 접하지 못할 것 같은, 나와 다른 세계의  전혀 다른 캐릭터를 경험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케이크와 맥주라는 책이 예언집이 된 것처럼 그는 작중소설가 드리필드처럼 오랫동안 생존을 했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다. 
말년에는 명예도 얻고 여든이 넘어서는 평론집을 끝으로 작가생활 은퇴도 선언하고 아흔한 살이 되어서야 눈을 감았다. 
 
노작가로 늙었다는 것은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작가적 기량을 발전시켜 왔음을 뜻한다고 황소연 번역가는 말한다. 
서머싯 몸 같은 대작가와 비교할 수 는 없지만 나는 어떠한 기량을 발전시키며 시간을 보낼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본다. 
 
 
 
 






밑줄 그은 구절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한때 친밀하게 지냈으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응대하는 것이다. 양측이 모두 평범한 처지에 머물러 있다면 인연이 자연스럽게 끊어지면서 아무런 악감정이 생기지 않지만, 만약 한쪽이 대단한 지위를 성취한 경우라면 어색한 상황이 펼쳐진다. p23

거리의 행인들은 낮의 느긋한 기운에 사로잡혀하던 일을 도중에 멈추고 인생이라는 그림을 쳐다보고 싶은 갑작스러운 충동이 든 것처럼 무심하게 걸어갔다. p33

로지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뮤직홀에서 저녁 시간을 보낸 뒤 날씨가 좋은 밤이면 걷곤 했는데 둘이 걸어 돌아올 때 그녀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친밀하고 편히 다가왔다. 상대를 배제한 침묵이 아니라 충만한 행복감 안에 상대를 끌어안은 침묵이었다. p203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인간의 복잡성과 변덕, 부조리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중년이나 노년의 작가들이 더 진중한 주제로 생각을 돌려야 마땅함에도 가상 인물의 사소한 관심사에 몰두하는 유일한 변명이 되곤 한다. ‘인류에 대한 올바른 연구는 인간을 연구하는 것이 맞다면 현실의 불합리하고 모호한 인물보다는 일관되고 견고하며 의미가 있는 가공인물에 전념하는 것이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p211


“그럼 된 거야. 안달하고 질투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면 안 돼?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p224

그는 삶이 끝난 남자였다. 내게는 구상 중인 책들과 희곡들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계획들도 수두룩했다. 흥미진진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 역시 남들의 눈에는 내 눈에 비친 이 남자처럼 나이 든 남자에 불과하겠구나 싶었다.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