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좋은 엄마가 되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적당히 좋은 어머니'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위니콧은 아이에게 적당히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보통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최선의 양육이라고 했다. 아이도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하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완벽한 엄마보다는 빈틈이 있는 엄마를 통해 비로소 아이는 성장할 수 있다. p174
- 마흔의 문장들 / 유지현
아이들 개학하기 전 어디라도 다녀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남편 일정상 함께 가기 어려워 주자매와 나만 셋이 1박 2일 '부산'을 다녀오기로 했다.
우연히 SNS에서 보게 된 스카이캡슐이라는 모노레일 기차를 보고 '저거다!' 하고 꽂혀서 알아본 후 아이들에게 가겠느냐 의견을 묻고 학원 스케줄 등을 고려해서 강행한 1박 2일
아빠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석연치 않아했던(이유는 알고 있지만 캐묻지 않았다...)
경선생은 스카이캡슐과 해운대 바다를 보여주자 마지못해 끄덕였고 시봉이는 말해 모해. 이미 마음은 바닷가로 향해 있었다.
해운대를 방문해서 스카이캡슐을 타고 저녁에는 회를 먹고 바닷가를 거닐고 돌아오자가 목표였으므로 가장 먼저 '스카이캡슐' 예약을 하고 숙소와 내려갈 SRT 기차를 예매했다.
출발일이 다가오자 절기상 '우수' 기도 하고 전국적으로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계속 나온다.
일정을 미뤄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 다음 주에 비 오면 낭패이므로 떠나기로 했다.
아침부터 비가 보슬보슬 내려서 수서역까지 가는 길은 실망스러웠으나 대구를 지나면서부터 해가 비추더니 부산에 막상 도착하니 해가 쨍하니 떠 있고 봄날씨 같이 포근하여 주자매는 점퍼까지 벗고 다녔다.
부산여행이 게임이라면, 시작 전 테스트 게임을 성공한 기분이랄까.
첫 번째 퀘스트는 무사히 숙소 찾아가기인데, 아이들과 부산 지하철은 처음 타는 거라 꽤 긴장했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해운대역에 잘 도착.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까지는 도보로 십 분 남짓. 12시가 넘으니 허기져서 숙소 가는 길에 보인 해장국 집에서 한 그릇씩 먹고 출발했다. 아이들이 해장국을 좋아하고 잘 먹어줘서 고맙다. 든든하게 먹고 숙소로 이동. 각자 1인 1 가방을 메고 오려했으나 혹시 몰라서 캐리어를 끌고 왔더니 이동할 때마다 번거롭지만 가방까지 들고 왔으면 걸어가지도 못했을 수도.
위치
드디어 숙소 도착!
2008년 이후로 해운대 앞 바다에 온 건 처음이다. 말로만 듣던 엘시티도 보고. 오래전 해운대 기억만 가진 나에게는 화려하게 변한 해운대였지만 제주도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바다내음이 나니 주자매는 텐션이 오르고.
부산에 온 이유는 바로 스카이캡슐을 타기 위해서므로 짐만 숙소에 놓고 바람같이 탑승장으로 이동했다. 도보로도 가능한 거리라 주자매를 앞세워 지도앱을 보고 3시 도착을 목표로 애써 걸었으나, 도착하고 나서도 40분가량 대가하다 겨우 탑승했다. 긴 기다림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은 캡슐기차였다. 연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제대로 풍경을 봤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 표정만 봐도 즐거웠다.
깔깔 거리는 주자매 웃음소리와 연신 찰칵 찰칵 촬영하는 소리를 들으니 잘 내려왔다 싶어 흐뭇했다. 회사 일에 치이며 바쁘게 살지만 잠시만 내려놓으면 정말 별 일 아니다.
기차는 청사포라는 곳에 정차했다.
해변열차도 운행 중이라, 기찻길 옆에 해질녘에 있으면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길래, 근처 카페에서 당을 보충하고 돌아오기로 했다.
당 섭취가 끝나자마자
빨간등대가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 케이크를 누가 더 먹을 것인가로 싸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등대를 뒤로 하고 포즈를 취해가며 서로 멋진 모습을 찍어주느라 바쁘다. (엄마는 안 찍어줘서 서운했…)
저녁 6시가 다 돼 가서 해변열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요트까지 타는 것도 고려해 봤는데 주자매의 반대로 실행은 하지 못했다. 요트는 담 기회에…. 다시 도전.
해변열차는 사람이 많아서 입석으로 탔는데 저녁이라 그런지 어두워 바깥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캡슐 기차보다는 빠르게 이동해서 순식간에 도착.
숙소로 이동해서 근처 음식점에 가서 회를 포장해 와서 먹고 쉬다가 밤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남편이 없는 일정이라 이 모든 건 엄마인 내가 해야 돼서 체력적으로 힘들었으나… 기쁜 마음으로…
맛있게 잘 먹었는데, 회 때문인지 낙지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고 이틀 후 낮부터 세 모녀 모두 배가 아파 고생했다.
오늘의 마지막 미션
쏴악 쏴악 파도 소리를 뒤로 하고 겨울 밤바다 보기
온도도 영상이라 춥지도 않고 모래사장 위를 거닐기에도 좋았다.
경선생은 제주도에서도 강원도 양양에서도 바다를 갔었지만 부산과는 또 다른 것 같다고 한다.
부드러운 모래를 느끼며 아쉬워하던 시봉은 내일 아침에는 꼭 맨발로 모래를 밟을 거라 다짐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하루의 미션을 완벽하게 끝낸 우리는 내일을 위해 잘 자고 일어나기로 했다.
아이들은 각 1인 1 침대를 쓰고, 나는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누웠는데 다음 날 매트 때문인지
혼자 짐을 옮기고 다녀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비 때문인지 온몸이 욱신 욱신 쑤셨다.
이른 아침 문을 연 전복죽 가게에서 죽을 사 와서 든든히 먹고
비 오는 바다지만 모래를 밟고야 가겠다는 시봉 때문에 서둘러 바다로 향했다.
분위기 넘치게 바다를 보며 커피 한 잔을 먹고 싶었으나 너무 추웠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국제시장에 갈까 물었더니
아기자기한 소품이 있다고 해서 부산 전포역 쪽을 가기로 했다.
아마 남편이랑 왔으면 절대 진행되지 않았을 코스지만... 주자매가 원하므로 이동하기로.
택시 기사님 덕분에 광안대교를 거쳐 전포동으로 이동했다.
비도 오는 날이라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 타고 가기에는 너무 힘들어 택시를 탔는데 잘 한 듯.
아이들이 가보고 싶어 했던 여러 소품 가게들을 캐리어를 끌고 여기저기 다녔는데
나중에는 어느 곳이었는지.. 상호가 가물하다.
다만 이재모 피자를 먹으라 추천해 주셨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서 식사 시간에 맞춰가니
모두들 오픈런을 한다고... 3시간 대기 시간을 보고 포기했다.
이재모 피자를 포기하고 검색해서 찾은 파스타집인데, 아이들이랑 왔다면서 파스타 2개, 브루스케타 1개 시켰다가
허겁지겁 파스타를 먹고 한 개 더 주문했다.
상호명은 : 셔터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잠시나마 행복을 느낀 우리들은
급격하게 혈당이 올라가면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까지 가는 내내 지쳐 있었다.
중간에 시봉이가 갈아타는 역에서 화장실 다녀오다 길을 잃어 위기의 순간이 있었으나
무사히 부산역까지 돌아와 시간에 맞춰 탑승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간 건 처음이다.
어릴 때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적은 있었지만, 1박 2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셋만 이동한 적은 없었다.
다녀와서 보니 엄마랑 둘이 다녀왔던 부산도 생각나고 더 나이 드시기 전에 국내 여행이라도 다니자고 해야겠다.
경선생은 여행 내내 꽤 신경을 쓰고 긴장을 했는지
올라오는 길에 다시 한번 여행 가자는 제안에 바로 답을 못하고 꾸물거린다.
아빠랑 가는 여행이면 가고 싶다고 ㅎㅎ
장담하건대 주자매는 빈틈 있는 엄마와의 여행으로 적어도 1cm는 성장했을 거라 믿는다.
대중교통 타는 방법,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법. 동선을 생각하고 그 다음 일정을 고려하는 것 등등
평소에는 아빠의 지도 아래 결정된 곳만 무작정 따라다니다가
엄마의 좌충우돌을 같이 감내하며 '살 길을 같이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같이 길찾기도 도왔던 듯 싶다.
완벽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은 한 스푼 정도
아이들에게 큰 공부가 되었을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