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를 익히는 사람은 훈련하면서 자신의 스타일과 장점을 발견한다. 권투라는 한 종목에서도 선수마다 경기 스타일은 천양지차다. 어지간히 얻어맞아도 끄떡없는 강골인데 돌파력이 있고 핵폭탄 같은 주먹을 지녔다면 인파이터가 된다. 팔이 길고 눈이 빠르고 오래 뛰어도 지치지 않는다면 아웃복서가 된다. 내가 맷집이 센지 아닌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맞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를. 그렇게 분투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깨닫는 거다.
장강명 / <책 한번 써봅시다> 중
마흔이 넘고 부터는
숫자 감각이(원래도 부족했지만) 더욱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몇 살인지 자꾸 헷갈려 한다(아마 믿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해를 넘길 때 마다 내년을 기약하며 벅차하고... 못다 한 일들을 아쉬워하며 회고했었는데
점점 무감해지고 있다.
22년도 나의 키워드는 '분투'다.
21년도에 이어 두드려 맞으며 맷집을 키워가는 한 해였다.
새로운 상품들이 출시되었고, 판매는 부진했고 해결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실패하는 기회도 연달아 얻으며 지내다 보니
얻어맞아도 끄떡없는 강골과 오래 뛰어도 지치지 않는(전에 비해 회복이 더디긴 해도) 체력을 키우게 되었다.
마흔이 넘어 이런 업무 체력을 얻게 되다니.
'대체 여긴 어디- 내가 누구' 하는 순간순간이 찾아와 시험에 빠지기도 했지만
스타트업에 오지 않았으면 거드름이나 피우며 지냈을지도 모르겠다며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다.
아직 핵폭탄 같은 한 방의 주먹도, 빠르고 순발력 넘치는 승부도 못 보였지만
두드려 맞아도 쓰러지지는 않았고 '어쩌라고'의 정신으로 다음 시합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뛰어야 할지 조금은 알겠다.
막막함은 두려움으로, 그리고 불안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어놨는데
이제 최소한의 확신은 생겼다고 해야 할까.
감사할 일이다.
달리기라는 새로운 취미도 생겼는데 지난 11월에는 10km지만 마라톤 대회도 출전했다.
자본주의 러너로 한참 성장하다가 영하의 추위 앞에 바로 무릎을 꿇었다.
추위를 극복하고 멋진 겨울의 러너로 거듭나기 위해 한층 더 자본에 의존할 기세를 보이자
남편이 온통 자기가 쓰던 용품을 갖다 내밀어... 흥미를 잃고 말았다.
곧 봄이 올거니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지. 가벼운 경량 바람막이를 준비하면 의욕이 솟아날 지도?
2월부터는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바뀌기도 하고
내가 받은 복을 세어보기도 한다(현재 진행 중이다).
여전히 나는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몸소 깨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감사를 기록하면서부터 약간 편안해 졌다.
그리고 허지원 교수님 말씀처럼, 우아한 쇠퇴와 실패를 기억하려고 노력 중이다.
경선생은 초등에서의 마지막 학년을 보냈다.
사춘기의 경선생을 대하면서... 대체 중2병이란 얼마나 대단할지... 사뭇 두려웠던 지난 1년이었다.
아이의 성장만큼 남편과 나도 성장해야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싫은' 사춘기 딸을 대하는 것은 우리도 처음이니까.
특히, MBTI 성향상 경선생과 나는 대척점에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의 한 페이지로 모든 것이 이해되기도 했다.
부모와는 적당한 거리와 경계를 유지하며(?) 한 해를 보낸 경선생은 단짝 친구와는 매우 밀도있는 우정을 촘촘히 쌓고 있다. 영어학원에서 매주 만나며 간식도 나눠먹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아마도 친구일 듯 한데 잘 크고 있어 감사하다. 덕분에 영어학원도 꾸준히 잘 다니고 학기 말에는 마지막 단계까지 레벨업 했다. 휴직하고 영어책 도서관에서 빌려 나르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 옛날이다. 유튜브의 유혹에도 자주 넘어가고 남편이 스크린타임을 걸어둔 아이폰 잠금 기능 탈출도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도 냈지만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날은 외대부고에 가고 싶다며 학교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학교 심볼을 벽에 붙여놓고 오늘의 공부할 리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뜨개질에 빠져 있다. 고무뜨기에 심취해서 친구에게 줄 목도리를 뜨는 중이다.
시봉이야 말로 '꺾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준 한 해가 아닐까.
2학년 때 회장투표에 나가 '1표'를 받고(그 1표 역시 본인 자신의 표) 책상에 엎드려 통곡하던 시봉은
3학년, 4학년 인고의 시간을 거쳐 5학년 1학기. 회장이 아닌 부회장으로 선회하여 출사표를 던졌고
아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공약과 에스파 넥스트레벨 안무까지 완벽히 준비하여
드디어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권력에의 의지를 보여준 시봉은 전교 부회장 선거까지 출마했지만 쉽지 않았던 듯하다.
시봉은 다른 엄마들은 많은 도움을 준다면서 아쉬워했지만... 나는 스스로 해낸 시봉이가 기특하고 대견할 뿐이다.
언니에 비해 친구들도 금방 사귀지만 절교도 자주 한다. 관계에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며 성장하고 있는 듯싶다.
올해는 꿈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바뀌어서, 도서관에서 인테리어 관련된 책을 빌려와서 읽고 방 인테리어를 바꿔달라고 성화다. 결국, 생일 선물로 남편과 이케아에 가서 침대 밑에 까는 러그를 구매해 왔다. 프랑스인의 방에는 쓰레기통이 없다는 책을 읽고서는 자기 방에 있는 쓰레기통은 거실로 내보내기도 하고. 미니멀리즘을 따라 하며 책장에 있는 책은 다 밖으로 빼놓고 정작 본인 책장에는 한 칸에 3권 이상 꽂아두지 않는다. 덕분에 시봉 방 앞에 둔 거실장이 더욱 지저분해지고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려면 수학을 잘해야 된다고 하니 심통한 얼굴이 되었는데 앞으로도 그 꿈이 계속 이어질지 궁금하다.
남편은 매주 주말 농구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침대에 주로 누워 있었다.
윈스턴 처칠은 '앉을 수 있을 때 서 있지 말고, 누울 수 있을 때 앉지 마라'라고 했다던데
누울 수 있을 때면 바로 잠드는 사람이다.
새벽에 일어나 집 앞 체육관에 가서 수영을 하고 회사로 출근-
퇴근 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기세척기를 돌린 후 농구 하이라이트 영상을 시청
주말에는 새벽에 일어나 운동장을 뛰거나 체육관에 다녀온 후
아이들을 깨워 식사를 하고 시봉이 학원 라이딩 이후에 마트에서 장을 봐오고 낮잠을 잔다.
그리고 다시 농구를 하러 가는 이 소중한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며 한 해를 보냈다.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규칙을 만들어서 지속해 간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허망해하기도 했지만
일터가 아닌 곳에서는 체육인의 자세로 꾸준하게 슈팅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현재 농구 모임에서 나이로는 넘버 3이라고 하는데, 쉰이 넘어도 지속할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우리 주바다
할 수 있는 말이 작년에 비해 부쩍 늘었다.
바다야? 외에도. 뽀뽀. 온니(언니). 아이뻐(아이~이뻐).빠빠빠쭈께(아빠 밥 줄게) 등등
정말 천재 앵무새가 따로 없다.
바다로 나름의 루틴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안방에 책장에 올려진 피카추를 비롯한 미니어처 친구들을 다 바닥으로 내몰고 뽀뽀를 하며 애정을 표현한다. 이후 시봉이 방 거울 앞에서 한참을 논다.
날이 좋을 때는 베란다에도 나가서 한 바퀴 돌고 놀기도 했는데, 겨울이 온 후로는 창 밖을 바라만 본다.
11시 전후에는 살짝 졸면서 새장 안에 들어왔다가 오후에는 이 루틴을 반복한 후 저녁 8시 전후로 새장으로 다시 들어간다.
누가 새대가리라는 표현을 했는가. 얼마나 스마트한 앵무새인데.
너무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이다.
2023년. 어떤 키워드로 내 삶이 채워질지 궁금하다.
지난 한 해 스스로를 다독이며 일으켜 세운 키워드는 '감사'였는데
올해는 허지원 교수님의 말처럼 백번을 실망한대도 '지치지 않는 기대'를 품고 싶다.
내일의 날씨와 점심 식사 메뉴를. 판매가 부진해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음을.
신규제안이 계속 거절당해도 주말에 읽을 소설이 재미 있을 수 있으니.
노력하되 애쓰지 말며, 인지하되 의식하지 말고.
기대해 봅니다. 마흔 셋의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