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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24년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 하프 완주

by 와락 2024. 4. 10.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26p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일찌감치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 하프를 신청해 두고 탁상 캘린더에 동그라미를 친 후 기다렸다. 
벚꽃시즌의 경주는 숙소 부킹도 쉽지 않았는데, 남편이 숙박앱에서 저렴한 펜션으로 심지어 쿠폰까지 적용해서 예약한 덕에 편히 쉬고 달리기까지 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AI가 옆에 있었던 듯. 
알아서 척척 예약도 해 주고, 여보 나 이뻐? 나 좋아? 라고 물어보면 숨 돌릴 틈 없이 건조해서 바스러질 것 같은 친절함이 묻어있는 목소리로 '응 그럼, 이쁘지. 좋아하지'라고 답도 잘한다. 
 

 
대회가 토요일이라 금요일 내려가기로 했는데, 마침 식목일, 한식이 겹쳐 도로가 막힐 것 같다며
새벽 6시에 출발해야 한다는 AI의 지시로 아이들을 새벽부터 깨워 렌즈 빼주고 식사를 준비해 놓은 후 경주로 향했다. 
엄마는 마라톤을 참가할 테니 너희들은 학교도 학원도 잘 다녀오니라.
 
내려가는 중간 휴게소에 들러 내일의 달리기를 위해 미리(지나치게 이른 감도 있으나) 탄수화물을 섭취하기로 결정한 우리는 라면을 한 그릇씩 먹고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회사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출발해서 마음이 분주했는데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고 난 후부터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다. 아 달리러 가는구나. 와 신난다. 
 
점심은 회사 동료가 소개해 준 울산의 한 물회집에 가기로 했다. 
홀리한 횟집이라고 해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주일은 쉰다고, 회사 동료가 다니는 교회를 섬기는 분의 집이라고 한다.
울산이 경주와 이렇게 맞닿아 있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점심을 먹고 난 후 근처 바닷가도 구경하며 식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평일 휴가를 내고 낯선 도시에 와서 예상치 못한 식사도 하고 바다도 보면서 한 낮의 여유를 즐기는 이 달콤함이란.

성령 충만 육일 횟집

 

거제도 강정횟집 물회랑 비슷한 맛인데 좀 더 매웠다.

 

횟집 앞 바다뷰, 금요일 오후 3시 바다 앞에 있다니! 세상에나


경주까지 내려왔고 숙소를 향해 가는 시간인데도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라니.  
갑자기 주어진 여유가 황송할 따름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예약해서 큰 기대가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예상보다 깔끔한 숙소 컨디션에 만족스럽기도 하고. 숙소 안의 텔레비전을 주자매 없이 차지할 수 있다니!  김수현이 나온다는 눈물의 여왕 재방송도 침대에 누워서 본다. 내일을 위해 가볍게 몸풀기로 달릴까 싶었는데 침대에 누워 있으니 인절미처럼 몸이 말랑말랑 흐물 해진다. 저녁도 겨우 먹으러 나왔다. 점심에 먹은 물회가 매웠는지 속이 좀 불편해서 한식을 먹기로 하고 근처 음식점을 탐색해 보니 순두부 골목이 있다고 한다. 가장 리뷰가 많은 음식점은 대기 인원이 30명 가까이 돼서 우리는 스타벅스 옆의 이디야처럼 옆에 위치한 다른 순두부 가게에 들어가기로 했다. 맑은 순두부찌개와 우거짓국을 시켜 속을 다스린 후 벚꽃 옆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AI는 벚꽃 앞에서 찍어달라는 나의 요청을 너무나 정확하게 수행하였는데, 벚꽃은 너무 멋지고 내 얼굴은 호박인절미 같아 보였다. 촬영의 문제인지 인절미 콩고물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내 턱살 때문인지... 
간식은 먹지 않을 기세로 숙소로 가다가 우리는 다시 상점으로 되돌아가 경주빵을 사기로 했다. 단순히 먹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고 내일의 경기를 위해서이다(당당).
 

숙소 펜션 앞 정경, 그저 콧노래가 나온다
경주의 봄 밤,아름다워요

 

다시 되돌아가 사올 정도로 맛난 경주빵

 
 
 

설레여서인지 카페인을 오후에도 섭취해서인지 밤새 뒤척거리다 일어났다.
8시 시작인 경기라 한 시간 전인 7시에 주차장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세상에 비슷하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듯.
7시임에도 하마터면 주차를 못할 뻔했다.
주차장 가는 길도 벚꽃들의 향연이라 설레고 감사했다. 이 아름다운 주로를 달리는 기회가 생겼다니. 
작년 사진을 보니 꽃분홍 셔츠를 준 것 같았는데 올해는 무난한 아이보리 티셔츠라 만족스럽다. 낮기온이 17도에 육박해서 반팔 반바지를 입고 남편이 사준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었다. 대회를 위해 아껴둔 신발. 발볼이 넓어서인지 편하다.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주차장 가는 길,이 봄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요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스타트 지점으로 향했는데 그동안 대회는 경기 시작 직전에 도착해서 쫓기듯 출발선에 섰다 바로 카운트다운을 외쳤는데 이번에는 30분가량 미리 준비하다 보니 출발선에서 시장님 훈화 말씀도 듣고, 외국에서 온 참가자들의 셀카에도 여러 차례 배경으로 나오는 것 같고... 베트남, 대만 등 다양하게 오셔서 마라톤을 즐기고 있었다. 드디어 카운트다운. 5.4.3.2.1 출발! 워치에 달리기 앱도 실행시키고 허리춤에 찬 스마트폰도 정돈한다. 허리에 두른 스마트폰 덕분에 아름다운 광경도 찍을 수 있었지만... 달리기 끝나고 허리 통증이 계속돼서 이후에는 스마트폰은 두고 뛸 계획이다. 
 

스타트 지점에서 출발을 해 보는 경험은 거의 처음이다. 운 좋게 앞에 서 있다가 떠밀려 출발했는데 그래서인지 평소의 내 속도보다 오버한 상태에서 계속 달렸다. 게다가 내리막이라 수월하게 뛰었는데 꽃길을 내리막을 편안히 달리니 몸속 도파민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시작했구나. 너도 왔니? 나도 왔어. 어이 친구. 우리 오늘 한 번 해볼까? 
5km 지점 급수대를 지나고 10km  반환점 지점까지는 아주 어렵지 않게 남편과 뛰었다. '오예스'가 나와서 신나 하며 와구와구 먹고, 게토레이도 마시고 뛰었는데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더욱 오버하며 달렸던 듯싶다.
약 13km 이후부터 남편과 떨어져 달렸는데 눈앞에 룰루레몬 흰색반바지 여자분을 페이스메이커로 삼아 달렸다. 15km 즈음 왔을까. 이때부터 오르막이 시작되었던 듯싶은데... 와 남산 달리기가 생각나는 오르막이었다.
"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오르막길 가사가 절로 떠오르는 길.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달렸던 내리막이 요건 몰랐지. 그 내리막이 나야 나. 하고 웃는 느낌.
멀리서 한 남자분이 걸으면 안 돼!!!라고 큰 소리로 절규한다. 
남편 같아 보이는 남자분이 포기할 것 같은 표정의 여자분을 어르고 달래며 올라간다. 
우리 AI는 어디 있을까. 나중에 물어보니 고관절 통증으로 15km부터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끝까지 걷지는 않기로. 
아까 먹었던 오예스를 생각하며 남산 바이브로 올라가 봅시다. 
짜내고 짜낸 힘으로 오르니 평지가 나온다. 
 
무언가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간 느낌, 노란 풍선이 보인다. 출발선에서부터 본 2시간 10분 페이스메이커 아저씨.
오르막길을 올라오신 분 맞을까. 다 왔습니다~~~라고 사람들을 독려하며 파이팅을 외친다.
저 풍선을 놓치면 안 된다. 오로지 18km부터는 노란 풍선을 따라 전력 질주 했다.
어쩌면 나도 2시간 10분 페이스로 완주를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중간에 한 번 이렇게까지 달려야 되나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힘을 다해 따라갔다.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나중에는 생각 같은 것도 들지 않았다. 나의 구원자. 노란 풍선만이 진리이니.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 달린다. 좀 더 힘을 내 보고 싶은데 6분 10초대. 내 인생 최고 속도인데 더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다. 
두 발로 쿵쿵 결승선을 밟은 시점이 2시간 11분. 몸은 힘들어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2시간 12분 내로 들어와야 동아마라톤 같은 대회에서 풀마라톤을 신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래, 막연하게 2시간 12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엄두는 못 냈는데 달성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내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실력을 발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하위버전의 나보다 갱신된 느낌이랄까. 점차 어휘도 감소하고 기억력도 퇴보하고 있는 중 숫자로 나아진 것은 유일하게 달리기 기록이다. 
 
 
끝나고 난 후 간식과 메달을 찾으러 부스에 방문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얼굴들.
메달을 하나씩 목에 걸고 간식 봉지를 들고 사진을 찍는 러너들을 보니 흐뭇하다. 
주차장 방향을 잘못 알고 좀 헤맸는데, 남편을 다시 만나니 반갑다. 피니시라인에서 둘이 완주 기념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내년에도 다시 오면 되니까. 
 
 
달리고 난 후 허리 통증을 제외하고 크게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최근 시작한 근력운동이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았다. PT선생님께 알려주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돌아가는 길, 둘째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엄마 완주했다고, 집에 돌아간다 하니 중1 녀석은 시큰둥하다.
 
먼 길 운전하고 같이 달린 남편에게 고맙고
무리하게 오버페이스 했지만 부상 없이 달려주 내 몸에도 감사하다. 
 
차 안에서도 우리는 오르막길의 어려움을 같이 이야기하고 간식을 나눠먹으며 다음 달리기 대회를 기약했다.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즐거운 내리막이 나오고 난 후에는 예상치 못한 오르막길
사물놀이패가 응원해 줘서 힘이 났다


 

숨가쁘게 내려가던 벚꽃길

 

경주벚꽃 마라톤 나의 아저씨. 구원이자 진리였던 2시간 10분 페이스메이커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