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트로 모라비아의 소설 「권태」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권태에 토끼몰이 당하는 짐승"이다. 일이든 관계든 취미 생활이든 익숙해지면 지루해진다. 심지어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 아니면 권태"라는 비판적인 말까지 남겼다.
- 어른의 재미 / 진영호-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1년에 2회는 만나기로 암묵적 합의를 했는데
4월의 비오는 날 파전과 막걸리 약속이 각자의 사정으로 지연되면서 8월에나 돼서야 약속 시간을 잡을 수 있었다.
한 번 만나야지로 대부분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아이들과 강원도 여행 중에 무심코 1편을 보게 되어 계속 시청 중인 '나는 솔로 돌싱 편 16기' 영숙과 상철의 에피소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안 봐도 그만인 남의 연애사이지만 한 없이 가벼우면서도 쓸모없는 그러나 흥미진진의 대화는
내 친구들과 함께 해야 가장 재미있으므로 예고편에 나왔던 영숙이는 대체 왜 눈물을 보였는지, 상철이는 정숙에게 호감을 가졌을지 나눔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핫하다는 서울숲역으로 향했다.
만남의 시간은 내가 주로 제안하지만
약속 장소는 파워 J인 오양이 대체로 섭외한다.
정지는 같이 장소를 물색해 주고 의견을 주긴 하는데 나는 어디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메뉴도 친구들이 더 잘 알고 선택도 잘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메뉴 선정이 몹시 어렵다.
내가 왜 이리 친구들의 약속에서 메뉴 선정에 어려움을 겪는가 생각해 보니
친구들은 취향 중심의 선택이고 나는 가성비 중심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렇다 할 취향이 없는 나이기에 친구들의 선택을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옳다.
대망의 1차 장소는 차만다 서울숲점
6만 원이라는 거금의 예약금도 받는 곳인데 오양이 재빠르게 예약하여 토요일 12시에 만나기로 했다.
약속 전날
12시에 만나는 게 맞는지 사전 예약 알림 메시지를 오양은 보냈지만
단톡방의 숫자 2가 사라지지 않아 전전긍긍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약속 당일
가장 집이 먼 내가 제일 일찍 도착하여 오픈런을 하고
친구들은 각각 15분, 25분 가량 지각을 하였다.
음식 먹기도 전에 퇴실시간을 빠듯하게 안내해 줘서 빈정이 잠시 상해
브리티시 푸드 컴온... 맛만 없어보게...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것도 잠시.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깔깔거리다 조용히 해 달라는 주의를 받았다(머쓱)
나는 솔로는 놀랍게도 정지가 업데이트가 안 되어 있어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3명의 트라이앵글 시각이 중요하다. 2명만 봐서는 대화할 수 없는게 룰.
다음 모임 때는 꼭 챙겨 보고 오라며 당부도 잊지 않았다(단호)
맥주 한 잔으로는 아쉽다. 와인을 마셔야지.
대동단결하여 대낮의 음주 자리를 알아보던 차에
정지가 와인을 사서 서울숲 공원에서 뉴요커처럼 마시자 하였으나
뜨거운 8월의 열기에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모두들 쾌적한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마음을 돌렸다.
카페로 이동하여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카페인도 섭취했겠다. 힘이 나는구만.
로드샵도 방문해서 가방도 한 번씩 들어보고.
이제는 와인을 마셔야지요.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기뻐하며 들어가서 앉아 와인리스트를 보고서야
왜 테이블이 텅텅 비었는지 이유를 깨달았지만...
우리는 배가 부르기에 안주는 소박하게 와인은 한 병만 시키기로 했다.
만나기 전 요즘 유행한다는 성격테스트 같은 결과지를 놓고
너무 똑같다며 웃었는데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20대에 초반,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없음을... 시간이 허락해 준 인연이랄까.
와인을 다 마시고 얼큰하게 술이 올라왔음에도
세상에나 아직도 대낮같이 밝다니.
밀레니엄 시대, 스티커 사진 좀 찍어본 언니들이므로
인생네컷을 찍기로 했다. 오늘이 우리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니까.
꾸미기 소품들 사이에서 고민하다 사이보그 스타일(엄정화 느낌 아니까), 컬러별 머리띠까지 동원하여
리모컨으로 찰칵찰칵.
와하하하
사춘기 딸들에게 사진 찍어 보내니 무반응이다.
뒤늦게서야 시봉이가 ㅋㅋㅋㅋ로 답해줬다.
다음의 메뉴는
늘 그래왔듯이, 모임 중간이나 말미에는 항상 등장하는 떡볶이
성수동에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떡볶이 가게가 있다고 하여
예약대기를 걸어 놓고 입장.
주문을 잘못해서 진짜 외국스타일의 떡볶이를 먹게 되었는데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가 기대한 그 맛은 아니었지만. 가래떡을 튀기고 토마토소스에 매운맛을 감미한 스타일도 신선했다.
배가 불러 더 이상 음식을 먹긴 힘들지만
이렇게 헤어질 순 없지.
우리의 마지막은 다시 와인으로 마무리.
안주가 들어갈까 싶었지만 우리의 위대한 '위'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가볍게 시킨 안주라고는 하지만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아이들 렌즈를 껴줘야 된다고 내가 서두르지 않았다면
아마 새벽을 훌쩍 넘어서까지 모임은 계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이야기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계속되는데
신기하게도 똑같은 이야기라도 지루하지 않다.
그때의 감정선이 그대로 살아나기도 하고.
미숙한 시절의 우리가 생각나서 '아 젊었구려' 하고 추억에 젖기도 하고.
라떼는 말이야. 크게 소리 내면서도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친구가 있으니까.
우리는 11월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