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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나는 어떤 채소일까

by 와락 2017. 5. 16.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하나하나의 채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무심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그럴 때도 있다).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아침에 일어나 경선생을 준비시키고 학교에 보낸 다음

시봉이를 출근할 때처럼 회사 어린이집에 보내고  근처에서 운동을 하거나 바로 집에 돌아온다. 

회사 동료들을 마주칠 때가 있는데 머쓱해져서 인사만 하고.




이번에는 기필코 사전쓰기를 완수하겠다는 일념으로(시간 낭비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해내야 하는 그 무엇이 되어 버렸다)

집에 와서 사전쓰기를 하고 경이가 읽을 영어책들을 온라인서점에서 고르다 보면 곧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아이를 데리고 건강검진도 가야 하고 친구 엄마도 만나야 하고 나름 바쁘다.




어제는 방과후수업 참관 하는 것이 있어 거기에도 다녀 왔는데

경선생 반 친구 엄마를 만나 조심스레 학원 가기 전 운동장에서 같이 놀게 하는 것은 어떤지 제안을 했다.

회사에서 다른 업체와 미팅 제의를 하다가 거절을 당하더라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데

아이 친구 엄마에게 같이 놀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들 분식거리를 간단히 사들고와 학교 놀이터 벤치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는데

불안해 하는 나의 모습을 읽고서 친구 어머니(라고 써야 할 것 같다)가 "첫 애 맞죠?" 라고 물으셨다. 

자기도 첫 애 때는 그랬다면서. 우리 애가 아이들과 못 어울릴까봐 불안하고 잘 노는 것 같아도 

본인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며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엉켜 있던 마음의 끈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들과 모임을 가면  '학원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과연 내가 여기 있을 자리인가. 했었는데 

아이들 학원 말고도 일상의 대화. 이를테면 '야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엄마 일학년 

아직 갈 길이 멀다. 

또 다시 조급해 하고 이런 저런 만남에서 들은 정보에 흔들려 있었던 나를 돌아본다.. 


어떤 채소일지 모르지만, 다 각자의 마음과 사정이 있다. (누군가는 채소가 아니라 할지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 같았으면 좋겠다.

채소에 속하지만 과일 사이에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토마토.

하지만 그건 이상에 불과하고 현실의 나는 아마도 고추에 가깝지 않을까. 그것도 아주 매운.

내가 어렵다면 경선생은 토마토와 같았으면 한다. 

그러나 경이 역시 토마토 라기 보다 속과 겉이 비슷한 '무' 거나 반듯한 대파이지 않을까.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각자 본인의 채소 임무를 성실히 맡아 수행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잠시 몇 번의 만남으로 흔들리고 경이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지나치게 아이 인생에 개입하려고 했던 것도 반성한다.


어렵지만 묵묵히 내 길을 가야지. 

경이가 끓이는 소고기 무국에 무리하게 고추를 넣으려는 시도는 하지 말아야겠다.

아이가 무국이 아니라 깍두기를 담근다고 고춧가루를 내놓으라고 하면 그때 가서 가루가 될 것인지 곰곰히 고민해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