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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23년 손기정 마라톤 대회 하프 완주

by 와락 2023. 12. 2.

뉴욕 마라톤 대회 창시자 프레드 르보의 말대로,

"달리기에서는 당신이 일등으로 들어오든, 무리에 섞여 중간에 들어오든, 꼴찌로 들어오든 중요치 않다.

'해냈다'라고 말하는 것, 거기에 큰 만족감이 있다. p60 

I Hate Running 나는 달리기가 싫어 / 브렌던 레너드 

 

 

 

작년에는 10km 대회에 나가 완주 메달을 받은 자신이 대견하고 감격스러웠는데

오호라 올해는 하프에 도전하여 완주까지 해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시작하는 코스라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했다.

전날 꼼꼼하게 입고 갈 운동복과 동료가 선물해 준 스포츠젤(총 친구 몫까지 4개) 챙겨 두고. 

대회 아침 당황하게 될 까봐 챙겨둔 짐을 다시 살펴보고.

평소에도 이렇게 준비하면 남편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을 듯하다. 

 

상암까지 약 2시간 정도 걸릴 거라 예상하고 5시 30분에 집에서 출발하는 것을 목표로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잠을 청했다.

과연 하프를 달릴 수 있을까.

18km 정도가 최대 달려본 기록인데 혹시 달리다 종아리에 쥐가 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완주가 목표이므로 그때는 걸으면 되지 뭐.

 

도전을 하는 내 자신을 마구 칭찬해 주고 싶었다.

회사일도 쉽지 않고, 사춘기 아이들도 어렵다. 

재테크는 더욱 더 모르겠고 얼굴 살은 계속 아래로 향하고 있다.

화로 앞에 녹아내리는 마시멜로 같은 턱을 보며 괄사로 주어 담듯 쓸어 올려 보지만 중력을 이길 순 없다.

 

 

출발하기 전 거울 앞에 선 나를 애정을 담아 바라본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아슬한 중년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애쓰는 사람

무엇을 해도 점차 속도는 더디어지고 본인도 모르게 예전엔, 라떼를 시전 하는 옛날 사람. 

 

 

과연 내가 하프를 뛸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시도한 나를 격려하며 지하철로 향했다.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다니. 

 

상암월드컵경기장 역에 내리기 전 합정역에서 화장실에 들러 탈의를 하고 같이 뛸 동료를 기다렸다.

둘 다 처음 뛰어보는 하프 마라톤이라 소풍가는 것 마냥 즐겁기만 하다.

 

드디어 경기장 입성 

몸을 푸는 사람들도 보이고, 다들 우비나 비닐봉지를 쓰고 있다. 

대회장에서 직접 체온을 보호하도록 비닐을 나눠주고 있어서 처음 써봤는데 도움이 되었다.

 

몇 차례 대회에 참석해 봤다고 

작년처럼 마냥 어리둥절해 하진 않는다. 경험 이상의 선배는 없는 듯싶다.

 

출발 선이 10km가 아니고 half로 이동.

배번 색깔도 다르고, 러너 기분이 나면서 몸이 더욱더 긴장되기 시작한다. 

사람들 표정도 여유 있어 보이고 아 신난다 신나

4.3.2.1 출발! 

 

상암동에 와서 처음 달려봤는데 11월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주로에서 억새도 계속 보게 되고. 

하늘이 흐렸는데도 예상보다 날이 춥지 않아서 더욱 달리기 좋았다. 서늘한 정도의 온도. 동료와 박자를 맞추며 함께 호흡. 서로를 격려하는 대화. 3km 남짓 지점마다 나오는 급수대. 물을 충분히 마셔야 다리가 저리지 않는다고 해서 목이 마르지 않아도 나오는 급수대는 지나치지 않고 입술이라도 적셨다. 

 

아침을 거르고 나와 출발 전에 스포츠젤을 먹었는데, 각성효과가 있었는지 집에서 조깅할 때 보다 속도가 계속 빨라져

동료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줬다. 천천히 뛰면서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완주가 목표였던지라 평소 조깅속도를 유지하며 걷는 것보다 약간 빠른 정도로 뛰었는데 덕분에 막판까지 힘들지 않았다. 

 

중간에 반환 지점까지 가는 교차로가 좁아 불편함이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초코파이도 여유롭게 한 개씩 먹으며 달리기를 즐겼다. 어떤 순간에는 달리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달리기가 놀이이고 내가 이 순간을 즐기고 있구나. 작년보다 성장한 나 자신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힘들지 않았고 걷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 1km 남짓 남기고는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마지막 피니시라인 찍힌 사진을 보면 얼굴에 비장함이 뚝뚝 흐른다. 

 

누구나 절대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아이일 수도, 직장 상사나 배우자일 수도, 혹은 그 모두일 수도 있다. 그 대상이 누구든 우리는 까먹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p96
I Hate Running 나는 달리기가 싫어 / 브렌던 레너드 

 

 

책에 나온 구절처럼 달리기에 있어서는 나 자신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속도를 내진 못하더라도 절대 멈추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으면 걷지 뭐'라고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속마음은 절대 대회에서는 걷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만큼 고수할 수 있어 기뻤다. 더구나 이 악물고 지킨 약속도 아니고 적당하게 어렵지 않게 해 낼 수 있어 감사했다. 

 

 

달릴 때마다 단 몇 초, 몇 분이라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리듬을 찾아 경쾌하고 우아하게 달리다 보면,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 움직임에 활력과 자신감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달리기를 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다. p13 ,  I Hate Running 나는 달리기가 싫어 / 브렌던 레너드 

 

 

처음 시작부터 피니시라인을 통과할 때까지 일정한 속도로 리듬을 찾아 달릴 수 있었다. 

나는 맥박도 불규칙하게 뛰는 사람이고 기분 변화의 기울기도 커서 종종 그 스펙트럼에 본인이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리기도 일수지만 그럼에도 나의 속도를 찾아 일관되게 지키고 실행했다는 이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남과 비교할 수도 없다. 브렌던 레너드의 말처럼 '하위 버전의 자신과 경쟁하는 것'이랄까. 

나이가 들 수록 죽음에 더 가까워져 가고, 나아지는 것이 없게 느껴지는 요즘. 나에게 주는 나 자신의 큰 선물. 

고맙소 2023년의 나님이여. 노화를 이길 순 없지만 나 자신을 통제하는 기쁨과 일관성을 맛보게 해 주셨군요. 

 

 

 

1킬로미터부터 165.6킬로미터까지 온갖 무모한 거리를 달리면서 내가 얻은 깨달음은 이렇다. 어떤 거리라도 일단 달리고 나면 더 이상 무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달리기 전에는 터무니없이 멀어 보이고 뛰는 중에도 뭐가 이리 먼가 싶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나면 그 정도는 할 만했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얼마나 달릴지 고민한다. p16 
 I Hate Running 나는 달리기가 싫어 / 브렌던 레너드 

 

 

 

브렌든 레너드처럼 하프를 달리고 나니 더 이상 21km 정도의 거리가 무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년에는 풀마라톤에 도전하려고 고민이 아닌 실행을 준비 중이다. 동아마라톤은 벌써 마감이 되어 다른 대회에 나가보려고 기쁜 마음으로 네이버검색창에 2024 마라톤 대회를 검색해 본다. 그리고 12월 1일부터 100일간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동계훈련에도 내돈내산으로 참여 중이다. 

 

 

 

2024년에는 

중력이 나의 턱 아래 살들을 더욱더 아래로 끌어내릴 것이고

아이들 학원비로 월급이 살짝 통장에 꽂혔다 나갈 것이며

실물경제가 어렵다고 하니 내년에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을 듯 하지만

달리기를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내년에는 더욱더 장거리를 달려보자.

강해질수록 다른 일들은 거뜬해 보이는 이 마법을 내년에도 경험해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뛴다.

불규칙한 심장박동이여. 쿵닥쿠쿵닥으로 뛸지라도 내 리듬을 만들어 봅시다.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가기 전 옷 준비(룰루레몬에서 긴팔티도 구매. 후후. 대회를 위한 완벽한 구매 명분)

 

 

지하철에서 찍은 사진. 일출을 보며 대회장 가는 길

 

하프 완주 성공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스포츠젤, 영국 제품이라고 한다.

 

출발 3초전. 제일 설레는 순간

 

보스턴 영화를 봐서 그런지 작년과는 손기정님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뿌듯한 완주메달. 잘 했어요.